Lithuanian Language2019.02.28 07:00



매년 2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빌니우스의 큰 행사. 지난 주 빌니우스에서는 4일 동안 도서 박람회가 열렸다. 전광판에 도서 박람회 광고가 지나가길래 책을 뜻하는 리투아니아 단어 Knyga 를 포착하려고 사진을 찍는데 정작 찍고 나니 광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라는 단어. '20년이나 됐으니 광고할 필요도 없지요' 가 광고 컨셉이라서 '빌니우스'와 '박람회' 단어만 남기고 정작 '도서' 자리에 다른 문구들을 채운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다른 단어 쓰기. 전시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회들, 노천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장터들을 리투아니아에서는 보통 '무게 Mugė' 라고 부른다. 봄은 이미 만져질듯 성큼 다가왔다. 2월의 마지막 주부터 연달아 열리는 도서 박람회와 3월 첫째주의 카지우코 무게는 빌니우스 사람들에게는 겨울을 떠나보내는 작별 인사이자 봄의 전령이다. 물론 2월과 3월의 기후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킨텍스나 부산의 벡스코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빌니우스의 대규모 전시회들이 주로 열리는 전시장 리텍스포(litexpo).  티비 타워에서 가깝고 주변이 온통 숲이라 공기도 좋고 산책하기 좋지만 사실 날이 좋은 여름에는 이곳에 갈 일이 거의 없다. 휴가철이니 사람들이 있을리 없고 여름에는 구시가처럼 야외에서 열리기 적합한 행사들이 주를 이룬다. 게임 전시회, 여행 박람회와 같은 굵직한 행사들은 전부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이곳에서 열린다. 4일간 6만 5천명 정도가 다녀갔다고 하니 빌니우스의 인구를 생각하면 큰 숫자다. 인구가 적은 리투아니아에서 공통의 화제 거리가 되는 이런 행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리투아니아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참여하고 크고 작은 출판 기념회와 토론회가 오전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전시장에서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지만 동분서주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시간대별로 나만의 시간표를 아예 만들어 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외에는 이렇다할 번역물을 내놓지 않는 어떤 출판사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가난한 사람들과 백야가 묶여진 책을 한 권 샀다. 왼쪽에서 첫번째는 '딸이 본 도스토예스프키' 라는 제목의 회상록으로 제법 읽을만하다. 



언젠가 대부분의 책을 그냥 영어 원서로 읽는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러니깐 대학을 졸업한 20대 친구이다. 워낙에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되는 책들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영어 원서를 읽다가 대학 졸업 무렵에는 결국 영어를 마스터하게 됐다는 소리를 했다. 물론 구조적으로 영어를 더 쉽게 습득할 수 있는 리투아니아어의 특성도 무시 못하지만 결국 뭔가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가피한 일상이 되어야 하나보다. 어쨌든 그럼에도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활발한 출판 테마는 역사이다. 정말 끊임없이 나오고 또 나오는 역사 관련 책들. 사실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 14세기 이후라고 생각하면 딱 조선 왕조와 구한말과 맞아 떨어지는 600여전 정도의 시간에 관한 책들이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빗살무늬토기 발굴지부터 배우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턱없이 짧다. 그 시간들을 또 잘게 쪼개고 또 쪼개고 이야기의 배경은 오히려 전통적인 구시가에서 빌니우스 교외로 넓혀간다. 그것은 리투아니아인의 나라로써의 리투아니아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려는 노력이자 폴란드와 러시아 심지어 우크라이나 같은 주변국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이 영토에 관한 자아성찰인지도 모르겠다. 박람회 나들이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의 리투아니아어 번역에 관한 좌담이었다. 이미 번역이 된 상태의 출판 기념회인줄 알았는데 프랑스어로 된 그의 이 시대 기념비적 창작물을 리투아니아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고 상징적인 작업인지 흥분 상태에서 설명하는 자리였음. 번역물이 없어서 영어 원서를 읽어야하는 맥락에서 보면 전공자들에게도 애호가들에게도 이런 작업 자체가 환영할일일 것이다. 그런 작업에 전문가로써 참여할 수 있는 그들이 멋있었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프랑스어로도 워낙에 독특한 어법과 비유들로 쓰여졌다고 하는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봐도 번역자가 얼마나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지가 눈에 보인다. 심지어 리투아니아어에는 있지도 않은 건축 용어도 엄청 많고 단순히 불어 전공자에게 번역을 맡기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어 폴란드어 러시아어판을 전부 고려해야했다고. 온 정성을 들여 번역될 리투아니아어판을 곧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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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설마

    도서박람회..
    우리나라도 매년할까요?
    찾아봐야겠네요.
    맨 마지막 사진에 움베르트 에코만 눈에 들어옵니다.
    몇일전 머리 쥐어짜면서 나의 무지를 또 한번 실감하며 에코 책을 읽어서..

    2019.03.01 21:45 [ ADDR : EDIT/ DEL : REPLY ]
  2. 책 표지의 도스토예프스키 초상은 거의 항상 저 두 장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르 코르뷔지에 번역에 대한 좌담 얘기가 인상깊네요. 두번째 사진을 보니 옛날옛날에 러샤 연수에서 막 돌아온 후 코엑스에서 열리는 무역박람회에 병아리눈물만큼의 일당을 받으며 통역 알바 다녔던 게 떠올라요.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 마약 주사기와 진공포장기에 대해 통역을 했습니다 ㅋ

    2019.03.03 01:2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정말 진정 저 사진밖에 없는거겠죠?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가서 도박장에서 도촬이라도해주고 싶은 마음..그나저나 앞서가는 통역 마약 주사기 통역. ㅋㅋ

      2019.03.03 03:57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