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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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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30_처남 매형 형부 Svainis(Švogeris) 간혹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형부'가 될 사람이나 '시동생'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그런 친척 호칭들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대충 '그래서 너의 그 '블루베리'랑 '모과'가 어쨌다고?' 라며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러니깐 형부, 처남, 매형,동서,제부 등등을 뜻하는 슈보게리스(Švogeris)와 스바이니스(Svainis)를 각각 블루베리를 뜻하는 쉴라우아게스(Šilauogės)와 모과를 뜻하는 스바라이니스(Svarainis)로 바꿔서 쓴 것인데. 친구들은 전혀 상관없는 단어를 연결 짓는 외국인을 웃기다고 쳐다보면서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듣다가 그 단어들이 은근히 비슷함을 깨닫고 어느새 자기들도 즐겨서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딱히 험담을 한건 아니지만 마치 담임 선생님을 담탱이라고 부르는 느낌이랑 ..
말벌 (Wasp,2003) 그리고 피쉬 탱크 (Fish tank,2009) 어떤 감독들은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영화라고 믿기 힘들 만큼 매번 전혀 다른 주제와 스타일의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어떤 감독들은 아주 끈질기게 비슷한 이야기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지치지 않고 만드는데 난 아마 후자의 경우를 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좋고 안드레아 아놀드를 조금 좋아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최신작 버드(https://ashland.tistory.com/558999)로부터 감독의 전작들을 찾아 계속 옮겨가다 보니 한 사람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토록 끈질기게 비슷한 주제를 파고든다면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온것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2009년 작 피쉬 탱크를 보기에 앞서 2003년..
굿타임 (Good time, 2017) 누군가 나에게 내일 은행을 털겠다고 말한다면 난 아마 다짜고짜 그래선 안된다고 말리진 못하고 은행털이 영화들의 고전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할 거다. 한편 '리얼 멕코이부터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거쳐 히트'까지 이미 모든 고전들을 마스터한 미래의 은행 강도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옛날 영화 속의 구닥다리 수법들은 통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처절한 실패로 끝나는 그런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이라곤 은행 창구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순간 그들이 발휘하는 고도의 자기 확신과 농축된 이기심뿐이라고. 그러면 난 그제야 이 자신감에 찬 은행 강도에게 어떤 은행을 어떻게 털 것인지 물어본다. 나는 염료 팩을 조심하라는 당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날부터 뉴스도 ..
아메리칸 허니 (American honey,2016) (https://ashland.tistory.com/558999)를 연출한 안드레아 아놀드의 2016년작 를 뒤늦게 찾아서 봤다. 가 막 홀로서기를 시작하려는 베일리속의 희망을 보여주며 끝이 났다면 는 오클라호마 소녀, 스타(사샤래인)가 돌보던 어린 동생들을 놔두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과감히 집을 뛰쳐나오는것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허니는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는 로드무비이다. 짐작컨대 이들 대다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가출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작은 밴을 타고 미국 전역을 돌며 값싼 여관에 짐을 풀고 팀리더가 정해준 지역(가정집들이 모여있는 부촌이나 장거리 화물 운전기사들이 집결하는 곳 등등)에 내려 잡지 구독권을 판다. 최대한 없어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동정심을 유발할..
우즈가베네스(Užgavėnės), 기름진 화요일, 사순절 전야 그리고 팬케이크,팬케이크,팬케이크 지난 4일 화요일은 리투아니아의 우즈가베네스(Užgavėnės) 였다. 우즈가베네스가 뭐냐면 사순절 전야, 팬케이크를 왕창 먹는 날, 스웨덴에서는 셈라를 먹는 날. 기름진 화요일 (Fat tuesday) 참회의 화요일 (Shrove tuesday), 마슬레니차, 마르디그라, 페티스다겐... 독어, 핀란드어, 스페인어 등등의 말로도 다 있을 거다. 한국 달력이 생겨서 벽에 걸었다. 음력 날짜와 24절기가 적혀있어서 너무 좋다. 부모님은 아직 음력 생일을 지내시니깐 1년에 한 번 인터넷에서 음력 날짜를 확인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게 은근히 일이고 그마저도 때를 놓친다. 한국 종이 달력이 생겨서 또 좋은 점은 어제도 먹고 일주일전에도 먹은 그 팬케이크를 '작정하고 왕창 먹는 화요일'이 언제인지 계산하..
Heaven knows what (2014) 책임질 수 없음에도 우리가 구원하려는 것.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봉준호 감독급의 감독은 세상에 몇 안된다고 했다는 인터뷰를 읽고 그 감독들이 이 배우가 함께 작업한 감독 중 한 명이라면 샤프디 형제일거라 생각했다. (https://ashland.tistory.com/895)를 구상하며 귀금속 상가들이 몰려있는 다이아몬드 디스트릭트를 취재하던 샤프디 형제는 지하철역에서 아리엘 홈즈를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 디스트릭트에 러시아인들이 많으니깐 이들은 처음에 아리엘 홈즈를 러시안으로 생각하고 영화에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연락이 두절된다. 얼마 후 손목을 긋는 자살시도를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리엘의 전화를 받는다. 사실 그녀는 홈리스이자 정키였다. 샤프디 형제는 이들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리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한..
슬로베니아 20센트 동전- 합스부르크의 명마 리피자너는 여전히 달리는 중. 돌이켜보니 말 한번 타보지 못한 그간의 내 인생에도 많은 말들이 있었다. 작은 숙녀 링이 타던 앤드류스, 제이크 질렌할을 브로크백마운틴까지 데려다주던 말, 와호장룡에서 장쯔이와 장첸을 태우고 광활한 벌판을 누비던 말,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크리스틴 토마스 스콧과 함께 사막을 배회하던 말, 무거운 짐을 싣고 가파른산을 오르기 전에 과음을 해야 했던 이란 영화 속의 노새들, 5살 내 동생이 설악산 입구에서 오천원주고 기념사진 찍었던 말, 그리고 슬로베니아 동전에 새겨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사랑했던 말, 리피자너. 언젠가 대형공구상점에서 연필깎는도구 하나를 사고 거슬러 받았던 이 20센트 슬로베니아 동전은 당시 그 행색이 지나치게 남루하여 나는 다시 상점으로 돌아가서 후시딘 연고처럼 생긴 금속 연마제를 ..
리투아니아어 129_카펫 Kilimas 작은 썸네일 이미지만 보면 얼핏 브뤼겔의 그림 같은 이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풍속화가 맞다. 겨울이 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보다 더 정겹게 담은 사진이 있을까. 사진은 아마 러시아 어디쯤이겠지만 좀 더 오래전엔 빌니우스에서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을 거다. 단조로운 놀이기구와 건물, 우샨까를 쓴 할아버지, 눈에 파묻힌 자동차들. 아마도 지금 빌니우스의 흐루쇼프카 계단에서 카펫을 끌고 눈 쌓인 놀이터를 향하는 할머니는 보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다음 장면..이들은 아마 토요일 아침부터 누군가가 카펫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소리를 듣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을 거다. 각자의 카펫에서 발생하는 굉음에 서로서로 묻어가며 겨울 먼지와 작별하는 의식. 나도 저걸 한번 해봤는데 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