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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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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43_Tvora 담장, 울타리 영화 햄닛(Hamnet)의 한 장면. 둘째 아들 햄닛을 잃고 수심에 잠긴 아녜스가 열심히 달걀을 깐다. 남은 아이들을 먹여야하고 생활은 계속되어야 한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셰익스피어는 런던으로 떠나려고 한다. 좀 더 머물러 달라고 붙잡기도 남편의 여행을 축복하기도 애매하다. 고뇌하는 셰익스피어를 처음 런던으로 보낸 것은 분명 아녜스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충분한 애도가 끝나기도 전에 자연스레 짐을 챙기는 남편이 어쩔 수 없이 야속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삶은 계속된다. 예술혼을 잠재울 수 없는 글쟁이 남편은 글을 써야 하고 어미는 생활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여러 모순들이 교차한다. 그리고 분명 착잡하고 슬픈 장면인데. 나는 분명 아녜스의 절망에 이입하며 안타까운 감동을 느껴야 하는데 뭔가 ..
리투아니아어 142_Jutiminė temperatūra 체감온도 '날씨가 문제가 아니라 입은 옷이 문제다'라는 말을 즐겨하는 리투아니아인들, 웬만해선 춥단 말을 잘 안 한다. 그렇다고 옷을 많이 껴입는것 같지도 않다. 사실 막상 겨울이 되면 0도일 때나 영하 20도일 때나 입는 옷은 비슷하다. 밖에서 기분좋게 걸어다닐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거나 짧아지거나 할 뿐이다. 감기는 정말 추울때 걸리는게 아니라 별로 안춥다고 느끼는 순간 걸린다. 옷을 많이 입는 것은 덜 입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기때문에 적당히 입고 모자 장갑 머플러는 보통 착용한다. 다양한 재질과 두께의 머플러를 기온에 따라 바꿔서 하는게 보온엔 제일 좋은 것 같다. 올해는 가장 추웠다고 기억하는 9년 전 겨울을 능가하는 추위였는데 어느날은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찍었다. 체감 온도라는 단어도 거의 안쓴다. ..
리투아니아어 141_Laiptinė 계단 'Ačiū" (소변을 분사하지 않으시고 담배꽁초를 투척하지 않으신 것에 감사합니다.) 1층 층계참 구석은 한동안 그런 용도였다. 아마 지난 세기에도 지지난 세기에도 그랬을 거다. 혹한의 거리에서 소변볼 엄두를 내지 못한 사람들이 비틀어져 닫히지 않는 남의 집 나무문을 밀고 들어와서 갈겼으며 이웃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을 공동 화장실을 예상하며 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갈겼을 거다. 어쩌면 이콘이 없는 구석 성소에서 앞뒤로 흔들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제 몸을 앞다투어 빠져나오는 따스한 물줄기에서 초상화에 없는 신의 형상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밖에서 끄고 들어오기엔 아마 장초였을거다. 바깥에서 다 피우기에 아마 그 겨울은 춥고 미끄러웠을 거다. 주머니 속의 담배가 탄로 나서 내 이웃이 탐할까 두려웠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140_구유 Prakartėlė , 1월의 연극 '아기 예수의 탄생' 가톨릭 국가인 리투아니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대성당 광장과 성당 내부에 프라카르텔레 Prakartėlė라고 불리는 세트 형식의 조형물이 등장한다. 야외의 공공장소에서는 비교적 크게 만들어지지만 실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크기는 천차만별이며 선반 위에 놓을 수 있을 정도의 미니어처 모형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으면 성경이 재밌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이 프라카르텔레를 볼 때에도 신성한 기분이 든다기보다는 묘하게 귀엽고 또 어떤 컨셉으로 꾸미고 바뀔까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이 단어는 '둘러싸다',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의 Praesaepe에 해당한다. 넓게보면 '가축을 가둬두기 위한 우리', '마구간'을 뜻하며 보금자리나 은신처를..
리투아니아어 136_올리브 Alyvuogės 이탈리아 도시 루카에 관한 짧은 기사를 읽다가 떠오른 장면 하나. 루카는 아마 피렌체에서 당일치기로 피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었다. 이 가게에서 점심용으로 술 한 병과 포카치아, 치즈 등 주전부리를 샀지만 정작 올리브는 사지 않았다. 아마 이 장면만으로도 충분했다 생각했나 보다. '올리브가 세 알 밖에 없으면 예쁜 접시에 담아먹으면 된다' 좋아하는 터키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극 중 부유한 극작가가 가난한 세입자의 지저분한 집을 보고 내뱉은 말이라 앞뒤 정황을 생각해 보면 좀 도도하고 재수 없게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이 대사가 참 좋았다. 올리브를 먹을 때마다 떠올리고 간혹 인용하게 된다. 작가가 생각해 낸 말일 수도 있지만 왠지 중동지역의 격언이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터키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
리투아니아어 135_우정 Draugystė 휴양지에서 만난 티셔츠 한 장. 저 흑백 프린트된 남성을 보자마자 혼신의 힘을 다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발뺌하다 결국 이실직고하는 어느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리투아니아 사람이라면 알 만한 꽤 유명한 장면인데. 그런 것들의 생리가 늘 그렇듯 일부 아는 사람들이 남들도 모두 다 알 거라고 생각하며 끈질기게 끼리끼리 회자하는 힘으로 인해 또다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1979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음주 운전자를 인터뷰한 장면인데 나에겐 일종의 음주와 우정의 질긴 밈처럼 각인됐다. 누구와 마셨냐고 물으니 친구라곤 없다며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사람의 웃픈 모습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회자된다. 한국어의 특성상 단어들을 연결 지을만한 일말의 의미라도 있을..
리투아니아어 134_고등어 Skumbrė 오른편으로는 라트비아, 멀리 바다 건너 스웨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뜬금없이 모터를 단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배를 댈 만한 아무런 명분도 준비하지 못한, 공들여 쌓아 놓은 던전과 감시탑이 있을 뿐인 모래사장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너무 요란해서 도리어 위협적이지 않은 모터소리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내려서 갑자기 총질을 할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다. 지방 유지의 아이들이 치기 어린 뱃놀이를 한다고 하기에는 허름한 배 한 척, 크레용으로 그려놓은 듯한 리투아니아 국기가 녹슨 뱃머리에서 펄럭이고 배안에는 한사코 안 가져가겠다는 아들들을 나무라며 엄마들이 던져놓은 듯한 구명조끼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팔고자 하는 이들은 그 흔한 호객의 단어 하나조차 내뱉지 않았지만 헐벗은 몇몇 사람들이 장지갑..
리투아니아어 133_파인애플 Ananasas 얼마 전에 빌니우스의 외국인 커뮤니티에 재밌는 글이 올라왔다. 유럽의 그토록 많은 언어에서 파인애플을 Ananas라고 하는데 이미 -as로 끝나는 이 친절한 외래어에 리투아니아어는 굳이 왜 또 남성어미인 -as를 붙이냐는 뉘앙스의 글이었다. 그의 고충을 이해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 가령 제임사스 스카르스가르다스 - 구텐베르가스처럼 불리는 것에 큰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나나스'라고 해도 다 알아들을 파인애플이 '아나나사스'가 되는것은 격변화를 위해선 사실 불가피한 일이다. 파인애플 쥬스 Ananasų sultys 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 남성 어미 -as를 붙이지 않고 외래어인 ananas에서 변형을 하면 s가 무참히 떨어져나가면서 Ananų sultys가 된다. 아나나수 대신 아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