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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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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18_비율과 관계 Santykis 마들렌의 핵심은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들어간다는 것. 적어도 내가 가진 레시피에서는 그렇다. 물론 반죽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위에 부어서 바르고 뿌리고 한다면 그런 단순한 공식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저 수더분한 마들렌을 원한다면 모든 재료의 양은 1이란 숫자로 통일된다. 홍두깨 선생님이 하니한테 지어주던 흰 밥도 쌀과 물의 비율은 아마 1이었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단어 Santykis는 비율의 뜻도 있지만 재밌게도 '관계'의 의미도 가진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노사관계 등등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관계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이상이라면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이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합쳐져서 달콤한 마들렌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는 좀 벅차오르는 지점이 ..
리투아니아어 117_고기분쇄기 Mėsmalė 그런 물건들이 있다. 딱히 실용적이지 않지만 버리기엔 무척 애매해진 것, 꺼낼 때마다 오래된 이웃들과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 카다시안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편리하게 잊는 것, 그 생애와 본적을 알고 싶어 절로 거꾸로 들어 밑바닥을 보게 하는 것, 한때는 모두에게 새로웠던 것,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별안간 폄하되는 것, 잊으려고 마음먹으면 걷잡을 수 없이 소멸되는 것. 그게 뭐 물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동안 파네베지에 있으면서 소련 시절의 오래된 고기분쇄기로 커피를 갈아 마셨다. 바닥에 쓰여진 대로라면 러시아어로 먀싸루프까Мясорувка, 리투아니아어로는 메스말레 Mėsmalė 라고 한다. 탁자에 고정시키고 손수 돌..
리투아니아어 116_목록 Sąrašas 마트에 가서 바구니를 집으려고 보니 옆바구니에 남겨진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그래서 그 바구니를 집었다. 이 쇼핑 리스트의 주인은 이 식품들을 전부 샀을까. 필기체를 썼고 복수를 잘 썼고 찍어야 할 곳에 점을 잘 찍었다. 긴 단어는 적당히 줄였고 파프리카에서는 망설였다. 대체로 자주 반복되는 기본 식품들을 사러 아주 일상적으로 마트에 왔다. 냉장고에 항시 있어야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목록을 작성했을거다. 가령 이것은 어른 아이 다같이 오랜만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토요일 오전을 위한 리스트 같다. Pirkinių sąrašas - 쇼핑 리스트 Pienas 2 vnt - 우유 두개 Graik.jogurtas - 그릭 요거트 Užtepėlė - 스프레드 Duona Batonas - 빵. ..
리투아니아어 115_고고학자 Archeologas 내가 처음 도착했던 2006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파네베지 버스 터미널. 17년 동안 나도 바뀌고 기후도 바뀌고 대통령도 바뀌고 화폐단위도 바뀌었지만 역내의 긴 나무 의자나 간판이라도 부분적으로 바뀔만한데 모든것이 소름 끼칠 만큼 그대로이다. 이 버스역에 들어서면 같은 해 겨울 들렀던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이 늘 떠오른다. 짐을 맡겨놓는 Bagažinė는 역내의 꿈꿈한 흐라녜니에, 체부렉이나 감자전 같은 주로 튀긴 음식들을 파는 Valgykla는 스탈로바야와 그저 똑같다. 다를 이유가 없는것이 맞다. 러시아 대도시의 역 규모는 리투아니아와 비교할 수도 없지만 이르쿠츠크는 상대적으로 소도시인지 그 오밀조밀 아는 사람끼리 부대끼는듯했던 인상을 종종 파네베지에서 느낀다. 파네베지는 얼마 전까..
리투아니아어 109_Rytas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하고 나쁜 날씨가 결국은 가장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오래된 나무가 꺾일 만큼 험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좀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날씨에 왠지 마음이 기운다. 모범적이고 우등한 날씨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인 듯한 그런 느낌의 날씨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씨에 휩싸여있을 때면 정말 찬란하고 따스하고 너무 분명해서 똑 부러졌던 날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그 순간엔 과거의 날씨도 현재의 날씨도 동등해진다. 어떤 것들은 온몸이 기억한다.
리투아니아어 100_9월 Rugsėjis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 벌써 9월이네. 우리 또 겨울을 어떻게 나지. '바냐 삼촌' 중의 심금을 울리는 대사.
리투아니아어 99_모과 Svarainiai 집에 탄산수가 있어서 작년에 만든 모과청과 섞어서 마셨다. 사실 모과 냄새와 그 끈적거리는 표면은 힘든 기억의 발원지. 어릴 땐 멀미가 심해서 지하철로 못 가는 곳은 잘 안 갔고 큰집이 있는 시골은 대관령이며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각종 고개를 돌고 돌아 도착하던 강원도 양양. 아빠는 이번엔 어떤 고개를 넘어갈까 어떤 국도를 탈까 늘 고민하셨다. 추석 무렵에 보았던 멋진 단풍들, 핸들을 잡고 조용하게 운전하던 아빠의 모습,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낭떠러지 같았던 고개들, 휴게소의 가락국수, 이해하기 힘들었던 오색 약수의 맛 모두 추억으로 남았지만 멀미는 참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자동차 특유의 냄새를 없앤다고 뒷좌석에 장식처럼 놔둔 모과는 오히려 자동차 향기를 머금은 못 먹는 과일의 인상이 생겨..
리투아니아어 97_캠핑 Stovykla 다 차려진 밥상에 나의 완전 소중한 알파벳 주머니 하나 달랑 얹었던 기생충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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