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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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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32_ Dar po vieną 한잔만 더 이른 아침 길에서 스티커를 주웠다. 우리 동네에 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여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자그마한 술집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입구 맞은편에 바가 있고 테이블이 전반적으로 높아서 의자에 앉지도 서지도 않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는 술집인데 공교롭게도 스티커는 그 술 집 앞에 있었다. 아직 스티커의 찐득한 점성이 남아있는 틈을 타서 좋아하는 책에 잽싸게 붙였다. 남자는 헌정되었다. 잘 어울린다. Dar po vieną ir į darbą 한잔(씩)만 더 마시고 일하러 가자. 낮술을 마시고 저녁에 일하러 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예 근무 중에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밤새 술을 마시고 바로 직장을 향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이 문장은 가장 애잔하게 와닿는다. 마치 숙어 같다..
리투아니아의 늪(Pelkė)과 미국의 장갑차(Šarvuotis) 빌니우스에서 47.5km 정도 떨어진 곳에 파브라데(Pabradė)라는 도시가 있다. 벨라루스 국경까지 10km 떨어진 이 도시에는 리투아니아의 군사 훈련장이 있다. 칼리닌그라드의 국경도시 키바르타이(Kyvartai)와 함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지난 수요일 이 파브라데의 늪지대에 70톤 규모의 미국 장갑차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미군 4명도 함께 실종됐다. 나토 가입국인 리투아니아에는 1000명가량의 미군 병력이 순환 주둔한다. 이런 장갑차는 전투에 나가는 기갑장비들이 어딘가에 빠지거나 파괴됐을 때 끌어내거나 작동에 문제가 생겨 고쳐야 할 때 투입되는 장비이다. 궤도나 엔진 등만 보면 전차 장비와 흡사하지만 공격용 무기는 탑재되지 않았고 대신 크레인 같은 장비들이 있어서 전투 장비들의..
리투아니아어 130_처남 매형 형부 Svainis(Švogeris) 간혹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형부'가 될 사람이나 '시동생'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그런 친척 호칭들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대충 '그래서 너의 그 '블루베리'랑 '모과'가 어쨌다고?' 라며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러니깐 형부, 처남, 매형,동서,제부 등등을 뜻하는 슈보게리스(Švogeris)와 스바이니스(Svainis)를 각각 블루베리를 뜻하는 쉴라우아게스(Šilauogės)와 모과를 뜻하는 스바라이니스(Svarainis)로 바꿔서 쓴 것인데. 친구들은 전혀 상관없는 단어를 연결 짓는 외국인을 웃기다고 쳐다보면서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듣다가 그 단어들이 은근히 비슷함을 깨닫고 어느새 자기들도 즐겨서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딱히 험담을 한건 아니지만 마치 담임 선생님을 담탱이라고 부르는 느낌이랑 ..
리투아니아어 129_카펫 Kilimas 작은 썸네일 이미지만 보면 얼핏 브뤼겔의 그림 같은 이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풍속화가 맞다. 겨울이 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보다 더 정겹게 담은 사진이 있을까. 사진은 아마 러시아 어디쯤이겠지만 좀 더 오래전엔 빌니우스에서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을 거다. 단조로운 놀이기구와 건물, 우샨까를 쓴 할아버지, 눈에 파묻힌 자동차들. 아마도 지금 빌니우스의 흐루쇼프카 계단에서 카펫을 끌고 눈 쌓인 놀이터를 향하는 할머니는 보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다음 장면..이들은 아마 토요일 아침부터 누군가가 카펫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소리를 듣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을 거다. 각자의 카펫에서 발생하는 굉음에 서로서로 묻어가며 겨울 먼지와 작별하는 의식. 나도 저걸 한번 해봤는데 효..
리투아니아어 128_지하도 Požeminė perėja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성별 막론하고 대개 그렇지 않을까. 먼발치의 지하도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괜히 좀 기분이 나빠진다. 빌니우스에는 유명한 지하도들이 몇 군데 있고 소련시절의 주거 단지 흐루쇼프카들이 몰려있는 지역에 주로 많은데 확실히 범죄 취약 지역의 이미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빌니우스의 지하도가 공사에 들어가면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다. 우선 밝은 조명들이 대폭 늘어나고 기존의 낙서와 욕설, 소모적인 그래피티 대신 밝고 긍정적인 벽화들이 채워진다. 이 지하도는 구시가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대형 전시장 근처에 있는데 입구는 여전히 사나워보이지만 오랜만에 가니 밝은 조명아래에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조명은 밝아졌지만 우크라이나의..
더 캐니언 (Gorge, 2025)-리투아니아어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 지난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이었다. 평소처럼 동네의 리투아니아 병무청 입대 독려 문구를 보며 귀가했다. 주거지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병무청의 창가를 휘감은 노란 램프의 조명들은 쓸쓸하게 여전히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롭게 업로드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의 마일즈 텔러와 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레비(마일즈 텔러)는 특급 스나이퍼들의 서사가 늘 그렇듯 잃을 것 도 지켜야할 것도 없는 고독한 미국인 특수 요원으로 나온다.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 언제나 그렇듯 여자 상사의 사무실로 불려 나간다. 예상대로 국제통화기금 총재처럼 엄격하지만 우아하게 나이 든 고위 공무원 시고니 위버가 기다리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비밀 단체의 고위관계자..
리투아니아어 127_탄핵 Apkalta 한국이 리투아니아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는 보통 북한과 관련해서이다. 애석하게도 북한의 김정은이 또 나름 월드 스타이기에. 그래서 아마 한국의 대통령은 김정은을 뛰어넘는 인지도를 얻고 네타냐후와 푸틴, 트럼프를 밀어내고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슈퍼스타가 되지도 못했다. 아무도 이 빌런의 서사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른다. 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골든 라즈베리 트로피 정도...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그나마 개인적으로 유익한 점이 있다면 리투아니아 언론에 비교적 신속하게 한국 소식이 올라와서 관련단어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BBC 등 여타 해외 유명매체들의 기사들이 재전달 되는 정도이긴 하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으며 ..
리투아니아어 123_Konteineris 컨테이너 찾는 책이 동네 도서관에 없어서 오랜만에 국립 도서관을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 뒤로 헤드셋을 낀 여인이 온갖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나른하게 앉아있다. Neieškok kampo, ieškok spec.konteinerio! 구석을 찾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 컨테이너 Konteineris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여러 용도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대개 일차적으로 쓰레기 컨테이너를 떠올린다. 전자 폐기물을 애꿎은 곳에 버리려고 애쓰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서 버리라는 내용의 벽화인데 그런 전용 컨테이너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이 벽화는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 알고 보니 이 헤드셋 여인의 원형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Portrait of Madame Récamier이라는 그림 속의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