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내일 은행을 털겠다고 말한다면 난 아마 다짜고짜 그래선 안된다고 말리진 못하고 은행털이 영화들의 고전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할 거다. 한편 '리얼 멕코이부터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거쳐 히트'까지 이미 모든 고전들을 마스터한 미래의 은행 강도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옛날 영화 속의 구닥다리 수법들은 통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처절한 실패로 끝나는 그런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이라곤 은행 창구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순간 그들이 발휘하는 고도의 자기 확신과 농축된 이기심뿐이라고. 그러면 난 그제야 이 자신감에 찬 은행 강도에게 어떤 은행을 어떻게 털 것인지 물어본다. 나는 염료 팩을 조심하라는 당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날부터 뉴스도 신문도 읽지 않을 거다.
영화 주인공들이 굳이 은행을 털겠다고 하면 무슨 이유인지 우리는 대체로 이 사회악들에 관대해진다. 그들이 목숨 걸고 훔친 돈으로 그토록 원하던 카리브 해변에서 용돈 기입장을 써가면서 최대한 오래 버텨내길 바란다. 아무도 용달 하나를 사서 동네에서 채소 장사할 밑천을 만들기 위해 은행씩이나 털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새로운 장소에서의 새 삶을 원하며 지금 서있는 이곳을 떠나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성실하게 일해서 차근차근 그 돈을 모을 생각은 없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인생이 아주 짧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인생은 작은 성냥갑과 같아서 확 긋자마자 금세 타들어가며 없어지는 성냥갑 속의 무수한 성냥개비처럼 오늘이라는 하루를 아낌없이 태운다. 그들 주위에 자기 삶을 사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넘쳐났다면 그들의 생은 좀 달라졌을까. 구겨진 성냥갑대신 연료를 채워야하는 지포라이터를 가지면 그들은 비로소 삶을 애지중지할 수 있을까.
뉴욕에 사는 코니(로버트 패틴슨)는 정신 지체를 겪는 동생 닉(베니 샤프디)을 끌여들어 은행을 털러 간다. 무서운 가면을 쓴 채 숨 막혀하는 동생을 안심시킨다. 조금만 참으면 이 뉴욕을 떠날 수 있어. 이곳은 우리에게 지옥이니깐.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들이 정말 우애 깊은 형제이긴 한 건지 코니는 왜 굳이 이 불안불안한 동생을 끌어들여 은행을 털려고 하는지 이해할 겨를도 주지 않고 샤프디 형제는 이들을 코너로 몰아붙인다. 이들은 두둑해진 가방을 들고 가까스로 은행을 빠져나오지만 돈가방 속에 보안 염료 팩까지 친절하게 넣어준 은행 직원 덕분에 돈은 이미 형광 분홍빛으로 물들고 난 후이다. 염료를 뒤집어쓰고 뉴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된 닉은 패닉에 빠진다. 다행히 코니는 심신미약의 동생을 버릴 만큼 잔인하진 않다.
은행을 털었으니 이제 은행 털이범과 경찰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하지만 동생 닉이 혼자 경찰에 잡히면서 코니의 인생 목표는 바뀐다. 무슨일이 있어도 닉이 감옥으로 가기 전에 구치소에서 꺼내와야 한다. 정신 지체를 겪는 닉에게 감옥보다 더 한 지옥은 없을거다. 훔친 돈은 결국 보석금으로 써야 한다. 하지만 염색이 되서 절반도 넘게 못쓰게 돈은 보석금에 턱도 없이 모자란다.
뉴욕, 퀸즈의 밤은 긴박하다. 그 긴 여정 속에서 곱상한 백인 코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남은 돈을 들고 뉴욕의 보석 대행 업체를 찾아가도 수수료로 먹고사는 직원은 은행 강도 코니를 신고하지 않는다. 코니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연상의 여자친구(제니퍼 제이슨 리)를 찾아가서 현금 서비스를 부탁하지만 여자 친구의 엄마는 카드를 정지시킨다. 길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코니를 외면하지 않는다. 냉동식품으로 가득 찬 흑인 할머니의 더러운 냉장고, 씻어낼 수 없는 가난으로 얼룩진 풍경들, 늘 경찰들이 순찰을 도는 뉴욕의 어두운 거리, 손님 없는 놀이 공원과 의심쩍은 비싼 술들로 가득한 놀이 공원 경비원의 아파트까지 코니가 발을 들이는 곳들은 뉴욕의 트럼프 타워와 타임 스퀘어가 뿜어내는 열기 따위는 닿지 않는 곳이다. 센트럴 파크의 평화로움도 브로드 웨이의 활기도 이곳엔 없다.
코니는 구치소에서 이미 싸움에 휘말려 병원에 누워있는 닉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휠체어에 개고생 해서 태워온 사람은 알고 보니 닉이 아닌 레이 (버디 듀레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뉴욕을 떠나야겠단 생각뿐이었던 코니는 동생과 함께였었던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참담하다. 동생을 구해야겠단 코니의 의심쩍은 형제애가 꿈틀댈수록 코니의 능수능란한 말발과 불쌍한 표정이 포텐을 터트릴수록 뉴욕의 선량한 시민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별다른 경계심 없이 코니를 재워줬던 흑인 소녀는 범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연행되고 멀쩡히 출근해서 경비를 서던 흑인은 입안 가득 LSD 농축액을 머금고 순식간에 범죄자가 된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병상에 누워있던 레이는 뜬금없이 범죄에 휘말려 아파트에서 추락사하고 코니의 여자친구는 착취가 일상이라는 듯이 코니에게 이용당한다.
굿타임은 샤프디 형제의 헤븐 노우즈 왓 (https://ashland11.com/559003)과 언컷 젬스(https://ashland11.com/895) 사이를 연결하는 영화이다. 헤븐 노우즈 왓이 기록 영화 느낌이 강한 극 영화라면 굿타임은 드라마의 절정부분만 쏙 빼내어 숨가쁘게 보여주는 뮤직 비디오 같고 언컷 젬스는 뉴욕의 치부를 드러내는 서사시에 가깝다. 샤프디 형제는 뉴욕이라는 도시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위선의 모세혈관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로버트 패틴슨의 미모를 미끼로 삼는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타락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기름지고 피로한 아담 샌들러로 키워서 괴사 상태로 몰고간다.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뉴욕의 거리를 활보하는 코니를 불안한 마음으로 따라가면서도 불쌍한 닉의 얼굴을 떠올리며 코니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라며 그를 이해하려 든다. 함께였을때 그들이 좀 더 완전해 보였다고 우린 믿고 싶어한다. 코니는 닉이 자신과 함께 있을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는 닉의 안락한 삶을 원하기나 할까. 그는 정글 같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닉을 그저 방패로 삼고 있는 건 아닐까. 코니는 순수한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속이며 자신의 숙련된 스킬에 도취당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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