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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ypt

Egypt 14_룩소르행 펠루카는 만선

나일강에서 (2003)


 
얼마 전에 생각지 못한 기회로 <만선>이라는 한국 연극을  온라인으로 보았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한국 연극이 아마 박광정과 권해효 배우가 나왔던 <아트>였으니 거의 20년 만에 본 한국 연극이다. 노트북 화면에 대사를 하는 배우들이 클로즈업되는 게 가장 신기했다. 실제 극장에서 연극을 보게 되면 누가 대사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보기를 원하는 '연기중'이지만 대사 없는 배우들을 훔쳐보며 그들의 시점에서 다른 배우들의 대사들을 느끼는 묘미가 있는데 갑자기 화면 속에서 사라지는 배우들이 있어서 좀 당혹스럽긴 했다. 화면을 최대한 클로즈업해서 그냥 무대를 풀샷으로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만선>은 아들 셋을 바다에서 잃고 딸도 밀린 배삯대신 팔려갈 위기에 처했지만 대담하게 다시 배를 빌려 바다로 나아가는 어부 '곰치'의 이야기이다. 늘 만선을 보장하지 않는 야속한 바다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만선을 믿고 비싼 배를 빌려 바다로 향한다. 이것이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인지 그저 자기 파괴적인 집착에 불과한 것인지 이젠 잘 모르겠다. 누군가 온 마음을 다해 돛을 펼쳐 파도를 넘어 헤쳐나가고자 한다면 그런대로 응원하겠지만 나 자신은 쌍돛을 달고 좇아가서라도 극복해야 할 뭔가를 가진 삶보다는 그런 돛이 없어도 크게 길을 잃지 않고 천천히 흘러가는 삶에 좀 더 마음이 기운다. 
 
아스완에서 룩소르까지 우리는 이틀간 나일강을 거슬렀다. 이집트 사람들이 펠루카를 저었고 돛을 움직였고 음식을 만들었고 노래도 불렀다. 펠루카 여행에 분명 돈을 지불했지만 그들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은 딱히 안 들었다.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한 솥 해서 조금 덜어주었고 차를 대접하는 친절도 베풀었다. 룩소르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가는 김에 우리를 태워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존재였다.
 
빌린 배값을 내고 음식비랑 연료비를 다 제하고도 최대한 많이 남기려면 저들은 한 달 내내 나일강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이윤 따윈 생각 안 해도 되는 고용된 뱃사공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배 한 척으로 온 식구가 먹고 사는지도 모를 일이고 어제 저녁에 훔친 배를 끌고 나와 시치미 떼고 저런 망중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삶을 모른다.

하지만 어렴풋이 펠루카 위에서의 저 순간의 삶은 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하얀 갈라비야를 입은 아저씨가 짧은 막대기를 잡고 자기 주위로 그린 둥근 원만큼의 삶은 눈에 보였다. 딱 그 정도 면적에 턱걸이할 수 있을 만큼 가뿐한 삶, 지루한 계산과 걱정과 짜증과 삶의 이물감들로 이루어진 사소한 침범들을 그냥 저렇게 앉은 채로 막대기를 쥐고 원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면 그것들이 밀려난 빈자리로 태양이 슬며시 들어찰것 같았다.
 
우리는 유유히 지나갔다. 강기슭에 버려진 듯 정박해서 태양을 온전히 다 받아내고 있는 갈라진 조각배와 호화 유람선들이 서로를 그저 흘려보냈다. 이따금 반대 방향의 아스완 쪽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에게서 람세스라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과거가 보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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