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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n Language

리투아니아어 135_우정 Draugystė

 

아무것도 안 마셨어요...직장에서 조금 마셨어요

 
 
휴양지에서 만난 티셔츠 한 장. 저 흑백 프린트된 남성을 보자마자 혼신의 힘을 다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발뺌하다 결국 이실직고하는 어느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리투아니아 사람이라면 알 만한 꽤 유명한 장면인데. 그런 것들의 생리가 늘 그렇듯 일부 아는 사람들이 남들도 모두 다 알 거라고 생각하며 끈질기게 끼리끼리 회자하는 힘으로 인해 또다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1979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음주 운전자를 인터뷰한 장면인데 나에겐 일종의 음주와 우정의 질긴 밈처럼 각인됐다. 누구와 마셨냐고 물으니 친구라곤 없다며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사람의 웃픈 모습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회자된다. 
 
한국어의 특성상 단어들을 연결 지을만한 일말의 의미라도 있을 때 초성마저 같으면 단어 사이에 생성되는 자성 같은 게 있다.

음주와 우정.

이 단어들도 약간 그렇다. 리투아니아어에서는 초성까진 아니지만 동일한 규칙으로 만들어지는 같은 품사의 단어들에서 일종의 각운효과 정도는 기대할 수 있다. 두운... 뭐 그것도 억지를 부린다면.

Girtuoklystė 그리고 Draugystė.

전자의 리투아니아 단어는 '음주'로 인한 모든 종류의 악행을 통칭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고약한 술버릇, 알코올 중독, 술주정 등등. 그러니 저 단어를 듣는 순간에는 취기로 완전히 허물어지기 직전의 인간이 군데군데 뚫린 미세한 피부 구멍들로 끈적한 숙취를 흘리며 주변까지 붙잡고 추락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리투아니아어에서 상습적인 음주, 폭음, 알코올 중독을 얘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은 많지만  '마신다 Geria라는 3인칭 동사만으로도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충분히 표현되고도 남는다.

술중독에 관해서라면 Alkoholizmas와 Girtuoklystė 가 보통 쓰인다. 전자는 딱 봐도 술과 관련됐음을 알 수 있는 단어이고 후자에 비하면 -니즘으로 인해 우습게도 좀 지성적이다. 후자는 '술 취한' Girtas , '술 취한 사람' Girtuoklis과 평생 이인삼각으로 함께 휘청거리는 명사로 주정뱅이를 헤어나기 힘든 하나의 상태로 못 박는 듯 잔인하다.

Alkoholizmas가 알코올 중독자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구제하려고 할 때 적절한 기준을 동원해서 친절하게 코너로 몰아넣는, 금주 시설에만 들어가면 아직은 해볼 만한 수준의 알코올 중독 수준의 어감이라면 후자는 이미 그 친절한 솎아냄의 사각지대로 밀려나서 자포자기 상태로 배회하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놓은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미 -ystė 때문인 것 같다.  군집생활을 하는 벌 Bitė에서 파생되어 우정을 뜻하게 된 Bičiulystė, 친구 Draugas에서 파생된 단어 우정 Draugystė.  그리고 취한 사람들 Girtuokliai을 모아놓은 Girtuoklystė는 조그만 마을에 집집마다 드리워진 알코올 중독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양은주전자를 들고 이장님 댁에 찾아가면 혀를 차면서도 마지못해 술을 부어주는 그런 정서말이다.
 
 
 

 
 
A 저 아무것도 안 마셨어요... 직장에서 조금, 쪼금 마셨어요. 
B 그래서 얼마나 마셨어요. 
A 마셨어요. 가만 보자... 두 잔이요. 두 잔 마셨어요. 
B 보드카? 와인?
A 보드카 한 잔이랑 와인도 조그맣게 이런 잔에. 보드카도 뭐 조그만 잔에. 더 이상은 안 마셨어요.
B 근데 술 마시고 트랙터 운전해야 된다는 건 알았죠? 
A 알았어요. 그럼 알았지요, 알다마다요.  
B 누구랑 마셨어요. 기억나는 친구 있나요.
A 친구랑.. 친구 몰라요. 아는 친구 없어요
B 누가 술 먹자고 했어요.
A 제가 처음 가서.. 마셨어요. 조금 마셨죠..
B 오늘 그 현장에서 처음 마신 건가요. 오늘 첫 출근이었던 건가요
A 첫날 아니에요. 둘째 날이에요.
B 술은 처음 마신 거예요?
A 두 번째요. 
B 두 번째라고요?
A 아니요. 처음이에요. 
 

'맛보라고 주시마세요. 빌니우스 청소년 7명 중 한명이 가족으로부터 술을 얻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 옥외주류광고는 불법이다. 하지만 저런 공공캠페인 뒷면에 무알콜 맥주 광고가 있다고 해도 결코 놀랍지 않다. 무알콜은 알코올의 명백한 부정이기에. 주말 마트에는 알코올판매 금지시간 맞춰 누군가 다급하게 카트를 밀어 계산대로 돌진할 것 같은 낌새로 충만하다. 때가 되면 주류 코너에 진입금지띠를 걸고 오전 10시가 되면 다시 떼어내는 직원의 일상도 떠오른다. 누군가가 술을 끊었다면 '그는 안 마셔 Jis negeria'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아무도 뭘 안 마시는데라고 되묻지 않는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뭘 왜 마셨는지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나에게도 어쩌면 음주와 우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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