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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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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단단한 겨울 (Seoul_2017) 한국의 겨울은 단지 가을보다 좀 춥고 여름보다 좀 많이 추운 상대적인 추위일뿐 추위 자체가 절대적인 혹독함이나 공포는 더 이상 지니지 않는듯하다. 하지만 겨울 그 자체만 놓고보면 더 춥고 덜 추운 날은 엄연히 존재하고 어제보다 더 추운 오늘을 지나온다면 오늘보다는 따뜻할지모르는 내일을 상상하며 겨울은 항상 그렇게 절대적인 틀속에 진행되는것 같다. 이번 겨울의 추위 중 딱 하나의 추위를 회상하라고 한다면 버티고개역의 기나긴 에스컬레이터 굴을 뚫고 나와서 올랐던 가파른 약수동 꼭대기 위의 전시 공간일거다. 석유 한통을 다 들이부었지만 이 공간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굴된듯한 시멘트 집터 속에는 추위에 관한 농담들과 시시콜콜한 계획과..
Arrival_Denis Villeneuve_2016 (Seoul_2017) 버티고개역에 내렸는데 매우 깊고 아득하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다행히 다른 역보다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움직였던 탓에 오히려 깊은 터널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있자니 얼마전에 Meadow land 에서 연달아 보았던 Arrival 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길가다가 에이미 아담스가 나온 포스터를 보았는데 이게 과연 내가 본 그 영화가 맞는지 순간 멈칫해서 쳐다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 굳이 왜 원제를 놔두고 제목을 바꾼것일까. 영어 제목을 한국어로 의역한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영어 제목으로 바꾸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싶어 신기했다. 아마도 어라이벌로 한글화하자니 어감이 이상했고 직역하자니 어색했고 그렇다고 ..
서울의 프랭키와 쟈니 (Seoul_2017)집에서 가깝고 조용하고 해가 좋을때 가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널찍한 곳에 빛이 쬐어 놀기 좋아 자주갔던 한국 예술 종합학교. 나만의 추억을 떠올리게했던 각양각색의 포스터들, 졸업 작품을 찍는 학생들, 학교 이름이 적힌 길고 긴 검은 패딩을 입고 삼삼오오 걸어다니던 학생들, 커피 믹스를 가져와서 학교 극장 정수기에서 커피를 타서 드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 교회 관련 전단지를 나눠주던 여인들, 잣나무, 새소리, 처음보다 짙어진듯한 느낌이 드는 콘크리트 건물들 등등등 많은 추억이 생겼다. 로버트 드니로와 알파치노에 관해 나눴던 짤막한 대화도 생각난다. 알파치노가 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그가 영화속에서 사랑했던 많은 여인들때문이리라. 대부의 마이클도 칼리토의 칼리토 ..
르코르뷔지에의 지중해 (Seoul_2017)르 코르뷔지에 전시장 맨 마지막 섹션에 그가 아내와 여생을 보낸 4평 남짓한 작은 통나무집이 실평수 그대로 재현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 창문 밖으로는 파도가 부서지는 지중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문득 바다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고 여겨졌다. 흘러온 곳과 흘러가는곳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그가 바라보았던 니스에서의 지중해와 내가 언젠가 반대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한편으로는 접촉면적이 아주 넓은 바다의 끝과 시작이 아닐까 싶었다.
Meadowland_Reed Morano_2015 (Meadowland_2015)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 모든 영화들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해 내가 일관적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영화를 통해서 내가 건드리고 흔들어버리고 싶은 내 감정의 영역이란것이 어쩌면 아주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는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어떤 소재와 주제를 다루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것은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의 독창성에 있다는 기술에 관한 믿음때문에도 그렇다. 연달아서 본 두편의 영화 Meadowland 와 Arrival. 비슷한 소재와 주제의 영화인가 싶다가 너무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후자는 심지어 미스터리 SF 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는데 미확인 생명체를 다룬 ..
르코르뷔지에의 오픈핸드 (Seoul_2017)15년전 인도의 챤디가르에서 오픈 핸드를 보았을때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보다 좀 더 이전에 서점 한 켠의 건축가의 도록속에서 그것을 처음 보았을때의 감동도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이렇게 만들고 이렇게 쓰고 그려서 표현할 수 있다는것에 대한 매료는 몹시 순간적이다. 오히려 무엇인가에 반하고 마음을 빼앗기는 현상의 근본에는 우리가 뭔가를 이토록 열렬히 좋아할 수 있음을 깨달았을때의 감동이 자리잡고 있는것 같다. 나는 내가 몇 페이지의 콘크리트 건물 그림을 보고 인도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얼마 전 3호선 버터플라이ㅇ 콘서트가 끝난 후에 밤거리를 걷다가 옷가게에 걸려있던 르 코르뷔지에의 전시회 포..
합정의 야구연습장 (Seoul_2017)합정의 어느 골목 끝에 서서 고개를 들었을때 내 눈에 스르륵 다가와 담기던 풍경. 이번에 와서 아직 인사동에 가보지 않았는데 그래서 인사동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그 야구 연습장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가면 첫째날이든 둘째날이든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대략 가보고 싶은 곳, 걸어가보고 싶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여기 그리고 저기 그러면서 찍어 보는 경우가 있다. 건물의 높낮이가 다채롭고 숨어있는 좁은 골목이 많은 서울 같은 곳에서는 굳이 어디에 올라가지 않고 아무곳에나 서있어도 불쑥 불쑥 솟아 있어서 저기 까지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끔 하는 곳들이 많다. 그런데 내가 정말 공간 감각이 없는건지 어쩔때엔 저만치쯤 있을거라 생각했던 건물은 이미 지나쳐왔고 생각지도 ..
약방의 커피 (Seoul_2017)을지로의 이 카페는 홍콩 가기 전 홍콩 카페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친구랑 남산 한옥 마을을 구경하고 커피 마실 곳을 찾다가 생각보다 충무로에서 을지로가 멀지 않아서 친구 모바일에서 길찾기를 켜고 찾아갔다. 가는 길에 자주갔던 명보 극장이 나왔고 개관작인 트루 라이즈를 보려고 긴 줄을 섰었던 을지로 3가역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쭈욱 걸었다. 명동성당에서 백병원을 지나 명보 극장으로 이어지던 길, 종각의 씨네코아에서 명동 성당으로 이어지던 길은 영화를 볼 때 빼고는 걸어 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극장을 지나쳐 커피를 마시러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이곳이 홍콩의 어딘가를 연상시킨다고 했던 블로거는 아마도 이곳에서 화양연화나 2046 같은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