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aily

(93)
스탠리 투치의 책 동네 마트 2층의 서점에 잠시 갔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장 두 페이지 정도만 읽고 나왔는데 재밌다. 배우 스탠리 투치가 쓴 음식 에세이였는데 중간중간 이탈리아 집밥 레시피도 보였다. 다음날 도서관에 간 김에 대출하려 했지만 대출 예약만 하고 왔다. 5번째 대출 예약자라고 했다. 제목은 '맛, 내 인생의 음식 Skonis, Maistas mano gyvenime. 정도가 되겠다. 스탠리 투치는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빅나이트의 배우이자 감독이기 때문에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책의 제목이 완전히 수긍이 갔고 책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은 후에야 스탠리 투치가 레시피 북도 출간했고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병을 앓고 음식 섭취가 얼마간 불가능했던 ..
어느 12월의 극장 만약 이곳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어느 극장이거나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이거나 하면 이 장면은 뉴요커나 파리지앵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풍경일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곳이 아닌 이곳에 살고 있어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들 앞에 굳이 지정학적 수사를 붙인 후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입 하는 것이 의외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에 놀라곤 한다. 나에게 이런 장면은 명백히 올가 혹은 옐레나, 아그네, 그레타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샤바의 쇼팽 연주회에서 마주르카를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도 그렇다. 이들 모두를 가둬 버리는 아주 깊고 넓고 차가운 호수가 있다. 파리에서의 1년에 대한 향수를 호소하며 꿈에 젖던 하얼빈의 러시아어 시간 ..
12월의 무라카미 류 12월 31일에 무심코 부엌 바닥에 흘린 밥풀을 하루 지나서 1월 1일에 밟았다고 치자. 슬리퍼에 눌어붙은 밥풀이 알아서 떨어질 리 없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일 위 여기저기에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고작 식은 밥풀 하나가 정말 이렇게 끈질기게 찐득 거릴 수 있다니 탄복할 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어서 하루 만에 4배의 크기로 짜부라진 '작년의 밥풀'을 그렇게 뜯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겨울인데 마치 지난겨울처럼 느껴지는 작년의 겨울 몇 장면을 떠올린다. 더 늦기 전에. 12월 초에 예상치 못한 책 소포를 받았다. 이웃 liontamer님께서 프라하 여행중에 읽으시려고 가져간 책들을 다 읽으시고 프라하에서 빌니우스로 보내주신 것이다. 뭔가 감각적이고 멜랑콜리하다. 게다..
지난 12월의 차 24잔. 11월 초에 친구가 보내온 어드벤트 달력. 푸카차는 클리퍼, 요기차와 함께 내가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허브차인데 성분이나 성격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확고한 차이가 있어서 몇 종류씩 사놓고 번갈아가며 마신다. 보통은 그날을 정리하는 의미의 마지막 차로 자기 전에 마시곤 했는데 12월엔 주로 아침 시간에 마셨다. 이건 아마 전 날 저녁에 먹다 남은 버섯을 팬 채로 그래도 데우다가 달걀 추가해서 먹은 아침이다. 마지막달 12월이 보통 그렇지만 역시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빨리 흘러간 것 같다. 작년 12월엔 눈이 정말 많이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점점 어두워지는 경향에 발맞춰 유난히 몸과 마음이 정말 느리고 고요하게 점점 가라앉으며 평온해지는 상태가 되었다. 눈 덕분에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12월의 11월 연극 회상 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
수수부꾸미 비포 앤 애프터 미리 불려놓지 않아서 오래 삶다가 팥의 진정성이 다 사라진 팥과 친척 언니가 작년에 보내주었던 수수가루와 계량컵으로 쓰는 유아용 컵 그리고 어디선가 끓고 있는 뜨거운 물. 익반죽이란 걸 하란다. 수수부꾸미를 먹으려면. 사실 딱히 팥을 좋아하지도 않고 팥죽도 안 먹고 야채호빵만 먹고 찐빵도 안 먹는데 뭔가 여기서 가끔 팥앙금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기분이 좋다. 여기저기 활용도가 높다. 약간 몽실언니에 나오던 개떡 같다. 잘 안 지워지는 음식 모형 지우개 같기도. 메이플 시럽을 끼얹고 우유와 먹는다. 진짜 맛있게 먹었는데 왜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까.
차 마시다 문득 이런 차 포장을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상자를 이렇게 크게 만드는 이유가 있으려나. 나는 차들이 좁은 상자 속에서 좀 정자세로 서있었으면 좋겠는데 보통 열면 산만하게 흐트러져있다. 그래서 보통 몇 잔 마시고 두 개를 합쳐 놓으면 딱 맞는다.
여름, Vasara, Лето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은 가을의 시작이다. 단지 달 앞의 숫자가 바뀔 뿐인데 어제의 여름이 보란 듯이 지난여름으로 재빨리 치환되는 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방금 끌어올린 그물 속에서 아직은 상처 나지 않은 채 팔딱거리는 이 여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영원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8월일 때 느긋하게 회상하고 싶었던 여름인데 가을이 급히 들이닥칠 것을 알았으면서도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느낌이 유난히 그득했던 지난여름. 여름, Vasara. Лето. 타인의 기억을 열처리하고 통조림해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감정 하나를 남겨준다는 것. 어떤 음악들. 노래하는 사람들. 어떤 영화들. 그들에겐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히페르볼레 Hi..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