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aily

(88)
힘든시간 결혼하고 리투아니아에 올 땐 가방 하나에 당장 입을 겨울 옷과 겨울 신발, 아끼는 음반과 책들을 주로 담았다. 조금 무게 초과해도 뭔가 이민 가는 느낌인데 좀 봐주겠지 하는 이상하고도 안일한 생각으로 갔는데 아에로쁠롯이 의외로 강경하여 고등학생 때 헌책방에서 사다 모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들은 그냥 공항에 놔두고 와야 했다. 아마 새 번역본으로 다시 사서 모으고 싶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아까웠다. 그때 항공사 직원이 직원 도서관에서 읽겠습니다 했는데 실제로 그 책들은 어디로 갔었을지 궁금하다. 그때 간신히 가져온 책 두 권이 토마스 만의 중편집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아마 열린 책들의 새로 산 책이어서 버리진 못했던 것 같다. 토마스 만의 중편 모음 집중에서 '힘든 시간..
여름, Vasara, Лето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은 가을의 시작이다. 단지 달 앞의 숫자가 바뀔 뿐인데 어제의 여름이 보란 듯이 지난여름으로 재빨리 치환되는 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방금 끌어올린 그물 속에서 아직은 상처 나지 않은 채 팔딱거리는 이 여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영원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8월일 때 느긋하게 회상하고 싶었던 여름인데 가을이 급히 들이닥칠 것을 알았으면서도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느낌이 유난히 그득했던 지난여름. 여름, Vasara. Лето. 타인의 기억을 열처리하고 통조림해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감정 하나를 남겨준다는 것. 어떤 음악들. 노래하는 사람들. 어떤 영화들. 그들에겐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히페르볼레 Hi..
여름에서 가을로 호주에 사는 친구 커플이 3년 만에 리투아니아에 왔다가 1달 만에 다시 호주로 돌아간 날. 선물 받은 접시에 샌드위치 담아서 레몬 넣은 따뜻한 홍차와 먹었다. 접시를 보자마자 나는 런던의 빅토리아 다리냐고 물었다. 시드니에 사는 친구들한테 말이다. 굉장히 막역한 사이었다면 엄청 타박받았거나 내가 설마 그것도 모르겠냐고 잡아뗐을 텐데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했던 비운의 접시. 런던 2주 여행하는 동안 나름 열심히 건너 다녀서 빅토리아한테 정들었었나 보다. 그 자태는 오해했지만.
랍상의 기억 예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아마 제목과 포스터가 풍기는 오페라의 유령스런 느낌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로도 극복하기 힘들었는지 계속 손을 대지 못하다가 한 달 전에 보게 된 영화. 팬텀 스레드. 영화를 보는 내내 여타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들을 떠올리며 감춰진 스타일의 접점을 찾으려고 꽤나 애를 썼지만 그러진 못했다. 그 이유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대사나 표정 그리고 옷차림을 구경하는데 그저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색이 팽배한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생각하니 그저 자신의 전작을 빛내준 영국인 명배우에게 헌정한 영화란 느낌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냥 다니엘 데이 루이스일 뿐이구나. 알 파치노만큼 나이가 들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영화 초반에 식당에서 꽤 까다롭게 아..
피렌체 두오모를 빠뜨린 파스타 마트에 나타난 건축물 파스타. 어린이용으로 동물 파스타 , 알파벳 파스타 뭐 많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약간 거래처에서 재고 소진하려고 강압적으로 판촉 해서 마트에 들어선 듯한 이런 반짝 제품들은 실제로 진열된 양만큼 다 팔리면 더 안 나오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사서 먹어본다. 그런데 피렌체 두오모 버젓이 그려놓고 두오모는 없다.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파스타로 구현해내기는 만만치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 창업자의 숙원 사업이었던 건축물 파스타를 손자가 기어코 만들어낸 느낌이긴 하지만 뭔가 이런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생산 라인 새로 만드는데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콜로세움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요 할아버지. 두오모는 정말 불가능해요.'. '네 아비도 그런 소릴 했지. 콜록콜록, 아니 두오모 속..
의복순례 파블로바 먹은 날인데 아마. 진짜 오랜만에 중고 옷가게 한바퀴를 돌았다. 역시 즉시 재채기 시작. 그래도 이 날 득템한 자켓을 날씨가 좀 추워진 틈에 신나게 입고 다녔다. 날씨 또 더워졌지만 금방 추워지겠지요.
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15분의 1 일부러 이렇게 먹으려던 게 아닌데 교묘하게 중간의 장미꽃 모양 초콜렛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것은 아마도 초콜렛 상자 뚜껑에 그려진 꽃에 대한 응답인것 같다. 코코아 조각과 장미 꽃잎, 체리 과육이 들어간 가학(향)홍차가 있어서 같이 마셨다. 밤이 깊어가지만 아직은 그래도 조금의 밝음이 남아있다. 초콜렛은 없지만 상자엔 아직 향기가 조금 남아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