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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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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커피 월초에 팀빌딩으로 1박 2일 하이킹에 다녀왔던 친구가 나름 재밌었다고 비가 오지 않는 주말에 언제든 한번 캠핑을 가자고 제안했었다. 친구와는 당일치기로 짧은 거리의 하이킹을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챙길 것 많은 캠핑은 둘 다 늘 망설였다. 여행을 갈 때면 먹을 일이 생길까 봐 약도 안 챙기고 붙일 일이 생길까 봐 밴드 같은 것도 챙기지 않게 된다. 그렇게 짐을 챙기는 것은 물론 무겁게 드는 것도 싫어하는 나로선 캠핑은 늘 모든 귀찮음의 전시장처럼 다가왔지만 고향집에 다 있으니 몸만 오라는 말에 솔깃했다. 나는 최소한의 옷과 아이와 함께 당일 먹을 도시락과 일회용 커피와 차만 넣고 친구의 고향집을 향하는 버스를 탔다. 리투아니아에서의 캠핑은 더울 때마다 수시로 뛰어들 수 있는 호수와 젖은 옷이 저절로 마를..
리투아니아어 97_캠핑 Stovykla 다 차려진 밥상에 나의 완전 소중한 알파벳 주머니 하나 달랑 얹었던 기생충 캠핑
피렌체 두오모를 빠뜨린 파스타 마트에 나타난 건축물 파스타. 어린이용으로 동물 파스타 , 알파벳 파스타 뭐 많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약간 거래처에서 재고 소진하려고 강압적으로 판촉 해서 마트에 들어선 듯한 이런 반짝 제품들은 실제로 진열된 양만큼 다 팔리면 더 안 나오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사서 먹어본다. 그런데 피렌체 두오모 버젓이 그려놓고 두오모는 없다.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파스타로 구현해내기는 만만치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 창업자의 숙원 사업이었던 건축물 파스타를 손자가 기어코 만들어낸 느낌이긴 하지만 뭔가 이런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생산 라인 새로 만드는데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콜로세움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요 할아버지. 두오모는 정말 불가능해요.'. '네 아비도 그런 소릴 했지. 콜록콜록, 아니 두오모 속..
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리투아니아어 96_광고 Reklama 거리 곳곳의 이런 옥외 광고 덕에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빌니우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거의 알 수 있어서 좋다. 픽시즈는 굉장히 열광하진 않았지만 다른 노이즈락 밴드 음악에 겸해 휩쓸려 꽤 열심히 들었던 밴드인데 이런 밴드가 이곳까지 공연을 하러 오는 게 신기하다. 공연 스케줄을 보니 이틀 후에 스톡홀름 또 이틀 후에 쾰른에 가고 8월엔 매일 도시를 바꿔가며 거의 중노동 수준의 공연을 하신다. 혹시 또 도래할지 모를 코로나 관련 제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요즘 다들 미친 듯이 공연을 하고 또 공연을 보고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광고 문구가 너무 웃기다. 광고 카피를 공연 대행사 마음대로 창작 할수 있는 건지 아님 아티스트와의 협의를 거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픽시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
Vilnius 172_빌니우스의 파블로바 필리에스 거리 근처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고 서울로 귀환하신 이웃님이 알려주셨다. 필리에스 거리에서 대천사 미카엘 성당을 잇는 미콜라스 거리였다. 빌니우스의 새로운 소식들을 도리어 이웃님께 전해듣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이 거리에는 나의 식당 동료가 태어나서부터 살고 있는 집이 있어서 자주 갔고 그의 집 마당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고 오곤 했다. 간혹 여행객들이 그 마당에 들어와 기념 사진을 찍는데 도무지 왜 사진을 찍는지 이해할 수 없다던 친구. 여름이 돌아올때마다 휴가비를 들여 빌니우스 근교의 여름 별장을 수리하더니 요즘은 아예 그곳에서 노부모를 모시며 출퇴근 하고 있어 정작 이 집은 보금자리가 필요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내어주었단다. 친구집에서 돌아올때마다 바리바리 싸주는 잼이며 통조림을 가져오느라 택..
리투아니아어 95_화장실 Tualetas 빌니우스 다녀가신 이웃님이 하나둘 꺼내놓으시는 빌니우스 이야기들을 읽는것이 참 재미있다. 어떤 장소들은 사진에 나온 주변 풍경이나 이야기 속의 정황들을 참고하여 구시가에 갈때마다 생각나면 들르곤 한다. 조금은 변한 모습들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곳들이 오랜동안 남아있다. 또 가보지 못했던 카페나 식당 소식을 전해듣기도 한다. 그럴땐 아바타가 되어 가본다. 새로 생긴 카페의 화장실 문에 위풍당당 붙어 있던 도장용 마스킹 테이프와 존재감 있는 알파벳 두개. 화장실이 급하다면 보통 아래의 다섯 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 문장이 짧을 수록 뭔가 덜 예의바르고 화장실이 급한 느낌을 준다. 물론 그냥 영어나 러시아로 물어봐도 대부분은 알아듣는다. -Tualetas? -Kur tualetas? -Turite tualetą..
리투아니아어 94_사이더 Sidras 여름은 바야흐로 사이더의 계절. 정말 더울때 진하게 푹 발효된 애플 사이더 한 잔은 정말 최고이다. 그냥 먹는 사과는 별로지만 시나몬에 졸인 사과와 사이더 그리고 칼바도스는 훌륭하다. 일년내내 술 한잔 안마셔도 전혀 불만없는 사람이지만. 요즘은 부엌에서 진짜 집중해서 뭔가 해야 하는데 방해요소가 너무 많으면 냉장고에 보통 한 병 정도는 있는 사이더를 한잔 따라 마신다. 사이더 한 모금에 취하지 아니 할진대 부엌에 달라붙는 아이들의 훼방이 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며 모든 일이 일사천리다. 알콜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