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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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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20센트 동전- 합스부르크의 명마 리피자너는 여전히 달리는 중. 돌이켜보니 말 한번 타보지 못한 그간의 내 인생에도 많은 말들이 있었다. 작은 숙녀 링이 타던 앤드류스, 제이크 질렌할을 브로크백마운틴까지 데려다주던 말, 와호장룡에서 장쯔이와 장첸을 태우고 광활한 벌판을 누비던 말,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크리스틴 토마스 스콧과 함께 사막을 배회하던 말, 무거운 짐을 싣고 가파른산을 오르기 전에 과음을 해야 했던 이란 영화 속의 노새들, 5살 내 동생이 설악산 입구에서 오천원주고 기념사진 찍었던 말, 그리고 슬로베니아 동전에 새겨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사랑했던 말, 리피자너. 언젠가 대형공구상점에서 연필깎는도구 하나를 사고 거슬러 받았던 이 20센트 슬로베니아 동전은 당시 그 행색이 지나치게 남루하여 나는 다시 상점으로 돌아가서 후시딘 연고처럼 생긴 금속 연마제를 ..
리투아니아어 129_카펫 Kilimas 작은 썸네일 이미지만 보면 얼핏 브뤼겔의 그림 같은 이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풍속화가 맞다. 겨울이 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보다 더 정겹게 담은 사진이 있을까. 사진은 아마 러시아 어디쯤이겠지만 좀 더 오래전엔 빌니우스에서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을 거다. 단조로운 놀이기구와 건물, 우샨까를 쓴 할아버지, 눈에 파묻힌 자동차들. 아마도 지금 빌니우스의 흐루쇼프카 계단에서 카펫을 끌고 눈 쌓인 놀이터를 향하는 할머니는 보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다음 장면..이들은 아마 토요일 아침부터 누군가가 카펫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소리를 듣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을 거다. 각자의 카펫에서 발생하는 굉음에 서로서로 묻어가며 겨울 먼지와 작별하는 의식. 나도 저걸 한번 해봤는데 효..
리투아니아어 128_지하도 Požeminė perėja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성별 막론하고 대개 그렇지 않을까. 먼발치의 지하도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괜히 좀 기분이 나빠진다. 빌니우스에는 유명한 지하도들이 몇 군데 있고 소련시절의 주거 단지 흐루쇼프카들이 몰려있는 지역에 주로 많은데 확실히 범죄 취약 지역의 이미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빌니우스의 지하도가 공사에 들어가면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다. 우선 밝은 조명들이 대폭 늘어나고 기존의 낙서와 욕설, 소모적인 그래피티 대신 밝고 긍정적인 벽화들이 채워진다. 이 지하도는 구시가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대형 전시장 근처에 있는데 입구는 여전히 사나워보이지만 오랜만에 가니 밝은 조명아래에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조명은 밝아졌지만 우크라이나의..
버드 (Bird, 2024) - 인생 배역 만난 배리 키오건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영화 Bird. 2024년에 본 영화 중에서 단연 가장 좋았던 영화이다. 좋은 영화는 보통 3가지 이유로 좋다. 1) 영상 자체가 아름답거나. 2) 내용이 훌륭하거나. 3) 전에 본 적 없는 형식이거나. 그리고 이 조건들을 전부 충족시키는 영화들이 드물지만 항상 나타난다. 얼마 전 '7세 고시'라는 테마의 다큐를 우연히 봤다. 때맞춰 10대 임산부에 대한 기사도 읽었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행복 유지가 가능한 평범한 아이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가혹한 시스템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영국 남부 바닷가 지방 켄트. 더 내려가서 도버 해협을 건너면 프랑스로 연결되고 아마도 육로로 가장 멀리 가려고 한다면 닿을 수 있는..
더 캐니언 (Gorge, 2025)-리투아니아어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 지난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이었다. 평소처럼 동네의 리투아니아 병무청 입대 독려 문구를 보며 귀가했다. 주거지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병무청의 창가를 휘감은 노란 램프의 조명들은 쓸쓸하게 여전히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롭게 업로드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의 마일즈 텔러와 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레비(마일즈 텔러)는 특급 스나이퍼들의 서사가 늘 그렇듯 잃을 것 도 지켜야할 것도 없는 고독한 미국인 특수 요원으로 나온다.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 언제나 그렇듯 여자 상사의 사무실로 불려 나간다. 예상대로 국제통화기금 총재처럼 엄격하지만 우아하게 나이 든 고위 공무원 시고니 위버가 기다리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비밀 단체의 고위관계자..
카페의 히든트랙 바리스타가 본격적으로 커피를 내리기 전 커피잔을 세팅하기 시작하면 나는 나대로 옆으로 비켜나 투명잔에 물을 담는다. 카페인으로 연결된 우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풍경의 전형...ㅋ 마지막 트랙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씨디 플레이어속의 디스크를 마주하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갑자기 솟구칠지 모르는 숨겨진 사운드를 가늠하며 볼륨키를 확인하곤 했다. 빈 커피잔 옆의 반쯤 채워진 물 잔이 남기는 여지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다 마신 커피는 언제든 카페를 떠나도 되는 이유가 되지만 언제나 조금 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물 잔이다. 기대할 것이 많지 않았던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 더 매달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히든트랙이 된다.
공연 전의 커피 산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극장문을 열고 나와 배우가 몸이 안 좋아서 연극이 취소됐다고 미안해했다. 세상에 많은 공연이 있다. 감동적인 공연, 형편없는 공연, 두 번째 보는 공연,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공연,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공연, 절대 봐선 안된다고 말리고 싶은 공연, 그리고 취소된 공연. 이들 중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장담할 수 있는 공연은 어쩌면 오직 '취소된 공연'이 아닐까. 공연은 이렇게도 시작되고 저렇게도 끝나지만 취소된 공연은 사정이 생겨 시작되지 못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작과 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름 끼치도록 일치해서 철저하게 공중분해된 느낌이다. 그리고 관객 모두는 극장 문 앞에서 그 파편들을 한 아름씩 나눠 안고 발길을 돌린다. 어떤 포지션에서든 공연이란 놈은 역시..
2024년의 차력 2024년의 어드벤트 차력(티캘린더)과 2025년 친구의 작품 달력. 고맙게도 3년째 이 조합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한다. 같은 소포 상자에 담겨있던 또 다른 친구가 전해준 동화책들. 행사에서 생긴 꽃 한 다발과 책자들, 언제나처럼 테이블 위의 잡동사니들과 함께 12월이 또 시작됐다. 11월 말에 독일 화물 수송기가 빌니우스 공항 근처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났었다. 비행기 잔해 옆으로 배송되지 못한 노란 상자들이 산산이 흩어져있고 그걸 주우러 갔던 사람들은 현장에서 잡혀가고. 그 와중에 독일에서 보낸 소포가 폴란드에서 움직이질 않는다는 친구의 문자. 어쩌면 친구가 보낸 차력이 굳이 추락한 비행기에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차력을 하늘로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3일 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