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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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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레드 오랜만에 간 극장. 이 빌니우스의 토종 극장에선 거의 7년전에 레오 까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봤었다. 이날은 이타미 주조의 회고전에서 탐포포를 보았다. 일정 기간마다 기억해서 꺼내보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 극장에선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좋아하는 옛날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접한다는 것은 독특한 즐거움이다. 모든것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가운데 아직 남았다면 그것이 모든 영역의 클래식이다. 탐포포가 라멘 육수를 끓이다 좌절하며 거대한 육수냄비를 뒤엎는 장면의 그 열기는 끈적했던 8월의 어느날 관객으로 꽉 찬 냉방이 되지 않는 극장 속으로 여과없이 뿜어져나오며 예상치 못한 고통을 유발했다. 늘 따끈한 라멘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부추겼던 이 귀여운 영화가 빌니우스에서도 찜통 열기를 떠올릴수 ..
India 12 9월 들어 의외로 따뜻한 날씨가 계속된다. 26도 남짓한 온도지만 9월의 최고 온도 기록을 깼다고도 한다. 9월 1일이 되면 꽤나 드라마틱하게 날씨가 추워진다. 물론 그것도 결국은 정해진 수순이니 그 바뀐 날씨는 놀라울 것이 없는데 추위를 납득할 수 있을 때의 더위는 딱히 반가운 존재는 아니다. 의외의 더위에 맞서는 가장 즐거운 방법은 그저 의외의 추위를 회상하는 것. 내 생애 가장 의외로 추웠던 시기라면 다르질링에서 트레킹을 했을때. 이집트 사막에서도 단체 사막 투어를 온 사람들이 넘겨준 담요가 아니었으면 아마 얼어 죽었을 거다. 트레킹 지역의 숙소들은 딱 보기엔 아늑했으나 모두가 잠든 밤엔 사정없이 매서워졌다. 겨울이어도 난방이 딱히 되지 않는데다 부족한 조명. 밤이 되면 바깥의 바람 소리 외에는 들..
더블 에스프레소와 파리 브레스트 지난겨울에 먹었던 파리 브레스트. 파리는 엄연히 낭만적이고 달콤해야 했겠지만 낯선 디저트 이름을 보는 순간 벨파스트가 몹쓸게도 가장 먼저 떠올랐다. 가본 적도 없는 벨파스트지만 몸을 덮은 얇은 헝겊조차 버거워하던 헝거의 마이클 패스빈더의 얼굴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도시이거늘. 이 모든 오해와 억측은 사실 브레스트라는 지명을 내가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리와 브레스트 구간에서 벌어졌던 자전거 경주 대회를 기념하며 만들어진 바퀴 모양의 디저트라고 한다. 물론 아주 오랜 옛날에. 이 빵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이라면 아마 이 날의 이 커피와 이 빵이었다. 늘 커다란 라떼잔에 담아주는 적은 양의 커피가 꼭 깊은 우물 바닥의 고인 물같았더랬는데 드디어 커피의 보송보송한 표면이 보이는..
Vilnius 174_미지와의 조우 한참 무르익던 유니텔 영퀴방이 한산해지는 새벽녘이 되면 보통 늘 보이는 사람들만 남고 비몽사몽한 기운에 나오는 문제도 비슷해진다. 마치 가장 마지막까지 술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보인 어묵탕 뚝배기를 습관적으로 휘젓는것처럼. 그 중 유난히 자주 등장해서 기억나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리포맨, 감각의 제국,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 피셔킹,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 등등 어쩌면 전혀 접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영화들이지만 모뎀 너머로 자신과 비슷한 영화광을 찾고 싶은 사람들이 최대한 현학적이고 비겁한 힌트를 내밀다 결국에 초성 힌트를 주며 마무리되는 공통점이 있는 영화들이다. 그중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도 출제자들이 좋아하는 영화였다. 아무도 못 맞출거라 작..
체코식 절인 치즈와의 작별 체코식 절인 치즈에 있던 올리브 기름으로 마지막으로 파스타를 해먹었다 . 구워진 야채든 말린 야채든 치즈든 그들을 품고 있는 올리브기름들은 너무나 소중하다. 파스타는 무엇보다도 기름맛으로 먹고 싶다. 면 삶고 남은 펄펄 끓는 면수를 싱크대에 흘려보내지 않고 남겨뒀다가 다 먹은 접시 위에 부으면 기름이 그냥 다 쓸려 내려간다. 다 먹은 파스타 접시와의 가장 바람직한 엔딩이다.
리투아니아어 105_노랑 Geltona 올여름 바닷가에서 발견한 자잘한 호박들과 지난여름에 주워서 말린 꾀꼬리버섯. 발트의 호박이 만들어낸 우연의 실루엣이 흡사 페루에서 칠레로 이어지는 해안선 같다. 어쩌면 여름을 맞이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해변에서 그리고 숲에서 코를 박고 찾는 이것들이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노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는다는 표현이 심히 전투적이고 상업적으로 들릴만큼 그 발견의 과정들은 차라리 여름 낮잠의 잠꼬대만큼이나 우연적이고 정적이다. 한여름에 꾀꼬리버섯을 말릴 때엔 이들이 자취를 감출 겨울이 되면 먹겠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지만 그 타고난 철이 여름인지라 결국 여름이 되어 커스터드 빛깔의 신선한 버섯을 본 뒤에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말린 버섯은 또 유예되고 여름은 겨울로 수렴되지 못하고 돌고 돈다.
누구의 바다도 아닌 발트 홍상수 감독이 영화 제목은 참 잘 짓는다 생각했다.
리투아니아어 104_그네 Sūpynės 소나무 숲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소련 그네. 2년 전과 변함없이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 절대 그네 줄 돌려서 빌빌 꽈서 풀고 할 수 없는 참으로 경직되고 올곶은 그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고 한다면 사람 없는 깜깜한 숲에서 앞뒤로 움직이다가 서서히 멈춰서는 그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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