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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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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5분. 이 카페는 정말 날씨가 지나치리만치 좋을 때 킥보드를 타고서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 자주 가지 않는 카페는 결코 아니다. 날씨가 그냥 자주 안 좋을 뿐. 대성당부터 베드로 성당 뒤쪽으로 이어지는 안타칼니스( antakalnis) 동네까지 네리스 강변을 따라 별다른 장애물 없이 쭉 타고 올라갈 때의 뻥 뚫리는 기분. 출퇴근 차량과 트롤리버스는 한결같은 매연을 내뿜고 있겠지만 곳곳의 과묵한 녹음들이 피톤치드를 분사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동한다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마음으로 혼자 몰래 불량식품 먹으러 간다는 생각으로 간다. 인터넷에서 중고책을 샀는데 만나서 전해주겠다는 장소가 바로 이 근처여서 오랜만에 이 카페에 들를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11월인데 벌써 너무 춥다. 4시에 만나기로 했는..
적절한 시기 요리를 언제 하느냐 하면 요리책을 펼쳤는데 재료가 집에 다 있을 때.
리투아니아어 112_Tūris 함량 세상에 여러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굳이 안 하는 것.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그리고 1) 평일 2) 대낮에 3) 마트의 독주코너를 4) 말끔한 정신으로 5) 어슬렁거리다 6) 구매의 목적을 창조하고 7) 세상과 나를 설득하는 것. 이들 중 제일 까다로운 즐거움은 단연 가장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이 즐거운 행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복잡 미묘한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하면 대체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질척이다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마치 정도를 넘겨 근본 없이 희석된 독주처럼. 꽁꽁 언 바닥에 엉겨 붙은 지난밤으로부터의 토사물처럼. 술을 선물하는것을 좋아하는데 술이든 뭐..
20세기 13시10분의 하늘 프라하에서부터 눈 덮인 선사유적지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 기억 속에서 계속 연장되어 언젠가 상점 계산대 앞에서 보았던 엽서 앞까지 나를 데려다 놓는다. 엽서를 뒤집어 보았다면 빅벤의 8촌 동서 정도 되보이는 저곳이 어디쯤이었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동상의 뒷모습이 의미심장하여 그냥 묻어 둔다. 종탑의 시곗바늘은 명명백백 오후 한 시를 넘겼고 화단 삼총사들이 뒤섞여 있었을 동상 주위의 원형 화단은 정직하기 짝이 없다.
프라하와 선사유적지 프라하에서 온 엽서를 보고 있자니 흡사한 엽서 한 장이 떠오른다.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고 그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어쩌면 오래전에 프라하에 갔을 때 똑같은 엽서를 사서 스스로에게 보낸 것인가 싶었다. 편지 상자와 책 페이지 사이사이를 뒤져서 결국 찾아낸 것은 알고 보니 한국의 눈 덮인 선사유적지 엽서. 아주 오래전에 양양 오산리 박물관에 갔을 때 빗살무늬토기 마그넷과 함께 가져온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프라하와 선사유적지의 풍경을 착각했다고 생각하니 누군가가 어부사시사에 드보르작의 미뉴에트 음정을 붙여 읊는다고 해도 마냥 이상하진 않을 것 같다.
잔지바르에서 온 떡볶이. 정거장에서 내리면 직장까지 50걸음 정도 대형 마트 내부를 지나쳐서 걸어간다. 나에게 뭔가를 팔아보려 했지만 불러 세우는 것조차 실패한 과거를 가진 어떤 사람을 지나고 현금지급기에서 돈뭉치를 꺼내 검은 가방에 집어넣는 중이지만 복면은 쓰지 않은 느긋한 현금수송팀을 지나고 술대신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계시는 건전한 할아버지들을 지나고 열심히 오늘의 반죽을 준비하는 도미노 피자 직원들도 지난다. 그렇게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타자들의 일상을 휘리릭 되새김질하며 걸어가는 와중의 찰나를 비집고 잔지바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날. 주변의 다른 목적지들에 비해 낯선 곳이었고 적힌 문자를 스스로 읽고 입안에서 발음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기억에 남았다. 이런 새로움들에 할애하는 꼬리를 무는 겉핥기의 시간..
Vilnius 175_모든 성인들의 날 주중의 이틀이 공휴일이어서 여유롭고 차분했던 지난 한 주. 간혹 비가 내리긴 했지만 11월 들어 기온이 많이 올랐다. 하지만 어둡고 휑한 거리를 걷는 옷속의 나와 주머니 속의 손이 유난히 포근했던건 기온 그 자체의 영향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갑자기 추워진 10월에 꺼내 입은 따뜻한 옷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입은 옷이 문제지 나쁜 날씨는 없다'는 말은 천번만번 맞는 말씀이지만 '너 자신이 옷을 알맞게 잘 입으면 된다'라는 개인책임론은 결국 좋은 날씨는 없다는 것의 반증이려나.
리투아니아어 111_숫자 Skaičius 이제는 이 동네식으로 숫자 쓰기에 익숙해져서 우체국에서 한국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야 할 때라든가 가장 최근만 해도 대사관에서 주민번호 하나를 적는 데에도 약간의 내적갈등이 일어난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내가 쓰던 식으로 적자니 이제는 내 손에 익지 않아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숫자를 적는 것만 같고 여기서 쓰던 대로 적자니 왠지 어떤 숫자는 오해의 여지를 남긴 채 잘못 읽힐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모든 숫자가 골고루 전부 포함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니 숫자 하나하나가 또렷하여 크게 헷갈리거나 딱히 애매해 보이는 숫자는 없다. 주로 문제가 되던 숫자 세 개를 조합하고 보니 반갑게도 외대 앞 정류장에서 수없이 지나쳐 보낸 147번 파란색 버스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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