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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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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54_Gyvenimas 인생 제목을 쓰기 전에 검색을 해보았다. 이 단어에 대해 과연 아직도 쓰지 않았을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습관적인 단어이고 그 단어를 쓰는 우리의 자세는 단어 자체의 울림에 비하면 오히려 한없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볼레벤이라는 독일 작가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는 '나무 수업'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신비로운 나무의 일생'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다. 뭔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가히 수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어 최종 제목을 두고 출판사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판매 부수에 좀 더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어를 궁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숲을 거닐며 이 나무 저 나무에 청진기를 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상상된..
순두부찌개 돌아오기 전 날 저녁 엄마가 끓여준 순두부 찌개를 보니 돌아와서 처음 끓였던 어떤 국이 생각난다. 고깃국을 끓이다가 간장을 좀 넣었는데 맛이 시큼해졌다. 뭘까. 싸구려 간장이라서 그런가. (키코만 간장이 아니면 대부분은 좀 구리다. 하인즈가 만든 간장도 예외는 아니다.) 혹시 무가 상했던건가. 고기가 상했나? 차라리 간장을 더 넣어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서랍을 열고나서 간장 대신 발자믹 식초를 넣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몰랐다.
겨울의 카페 케익의 첫인상은 항상 작다. 스모 선수를 보지 않아도 그는 거대할것이라 짐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맛없을 케익도 그는 항상 작게 느껴진다. 그 케익을 커보이게 하는 유일한 존재는 작은 데미타세 잔이다. 작은 에스프레소가 가져다 주는 희열이라면 어떤 케익을 먹어도 보통은 그 보다는 크다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케익을 다 먹었는데도 커피가 남아있는것이 싫다. 커피가 부족하다고 느끼는것이 훨씬 더 정당하다. 커피는 새로 마시면 되니깐. 겨울의 카페는 두 종류이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가는 카페가 늘 그렇듯 그 중 하나이겠고 하나는 단지 추워서 들어가는 카페이다. 오후 8시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중. 이대로 집까지 걷다간 죽을 것 같아 몸을 좀 녹이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다. 물론 장갑을 벗고, 모자를 제..
헬싱키에서 새해 맞이 Helsinki_2019 헬싱키의 하늘 아래에서 주어진 23시간. 공항을 빠져 나와서 다시 돌아가는 순간까지 온전히 어두웠고 그 어둠은 일견 비슷했겠지만 새벽을 파헤치고 나와 마주한 낯선곳의 어둠은 조금은 다른것이라고 생각했다. 밤의 적막속에서 스스로에 전율했을 신년의 어둠이 교회를 가두고 있던 축축한 암석 속으로 발 아래의 검은 아스팔트 속으로 창밖으로 새어나오던 따스한 크리스마스 조명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던 것이라고.
낮잠자는 몽마르뜨 Paris_2013'아주 오래 전' 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쓸 수 있는 말일까. 5년,10년 혹은 20년 전, 어쩌면 일주일 전, 하루 전, 한 시간 전.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간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간절할때, 단지 이미 지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없었던 것 처럼 느껴지는 어떤 순간들을 위한 말일 것이다.
Vilnius 81_겨울을 향해 짙어지는 것 두가지. 어둠과 빛. 아직 밝은 가운데에서도 짙게 느껴지는 빛. 어두운 낮의 계절이 온다.
Vilnius 80_너, 그 자체. 늘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좀 더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일때 아름다워지는 것. 도시도 예외는 아니겠지. 그랬으면.
Vilnius 79_계절의 정문 Vilnius_2018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문 근처에서 들어갈까말까 서성이고있는데 어디서 쏟아나왔는지도 모르는 갑작스런 인파에 밀려 엉겁결에 빨려들어가고 마는 어떤 계절의 초입.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너른 공간 한 가운데에 뚝 떨어져 서성이는 순간은 오히려 온화하다. 빠져나올때쯤은 오히려 아쉽다. 겨울은 항상 그렇다. 더 이상의 새 손님 맞이를 사양한채 꽝 닫혀진 겨울은 오히려 따사롭다. 지금이 가장 춥다. 열려있는 곧은 문이, 한 발짝 들이기만 하면 되는 그 문이 가장 커 보이고 가장 차갑다. 이른 아침 대성당 근처를 걸었다. 못보던 국수집이 보였다. 이제 이곳 사람들도 겨울의 국물과 조금씩 친해지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