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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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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143_눈 오는 일요일 올해만큼 눈이 많이 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면 어김없이 눈이 내려 이미 꽁꽁 얼어버린 선배 눈들 위를 소복히 덮고 또 조금 푸석해지다가 조금 녹기도하며 다시 좀 얼고 나면 다시 내려 쌓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주말 오전에 눈이 내리면 썰매를 끌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주말에는 그저 그렇게 눈이 쌓여있다. 치워지는 것도 애써 내린 눈 본인에게는 피곤한 일이라는 듯이. 너무 급하게 치워진 눈은 모두가 바쁘게 제 할일을 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어떤 가게 뭐든 뭔가를 조금씩 덜어서 사는 행위는 특유의 행복감을 준다. 100그램의 잎차나 20그램의 팔각. 0.5 리터의 참기름, 작은 초콜릿 두 개, 4개의 스트룹 와플, 자두 한 알. 양배추 롤 한 개, 심지어 나사못 100 그램 같은 것들 조차도. 한 개 혹은 두 개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보면 단순한 소비에도 서사가 생기고 사색의 여지가 생긴다. 그런 아날로그 느낌이 참 좋다. 이 가게는 각종 양념가루들과 기름을 판다. 나는 이곳에서 참기름을 주기적으로 사며 팔각이나 갈아먹을 후추. 인도 향신료 같은 것을 구매 가능한 최소량으로 산다. 이런 가게에서는 직원이 또 뭐 필요한 거 있나요 물어볼 때 부담스럽기는커녕 도리어 마음이 편해진다. 보통 저런 큰 통을 가져와서 중량을 재고 다시 가져다 놓고 돌아와서 또 ..
Vilnius 128_동네 한 바퀴 헤집고 또 헤집고 들어가도 끝이 없는 곳. 전부 다 똑같아 보이는 와중에 항상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는 곳. 그곳에 꼭 뭔가가 있지 않아도 되는 곳. 깊숙이 들어가서 몸을 비틀어 되돌아봤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곳. 너와 함께 헤매는 모든 곳.
Vilnius 124_동네 자작나무 골목 골목을 헤치고 마당안으로 들어서면 생각지도 못한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 지붕너머로 볼록하게 솟아 꽃들이 종처럼 매달린 밤나무가 그렇고 누구집 차고 옆 구석에 무심하게 서있는 라일락이 그렇다. 이 자작나무도 그랬다. 꽤나 컸고 한그루뿐이였고 유난히 하얬다. 제목에 비료자가 들어가는 러시아 노래가 있었는데 정말 찾아내서 다시 듣고 싶다. 예전에 러시아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러시아어 이름을 짓게 했을때 어떤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스스로를 비료자라 불렀다. 횡단 열차 속에서 휙휙 스쳐지나가는 수천 그루의 자작나무를 봤겠지만 오히려 사방의 눈과 함께여서 였는지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모처럼 맑았던 날 어느집 마당에서 만난 자작나무는 또 좀 달랐다.
Vilnius 123_9월의 그림자는 일주일 이상 흐린 날씨가 지속되고 오전마다 비가 내리며 기온이 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걷지 않은 빨래는 젖고 마르고 젖고 축축한채로 며칠을 있다가 운좋게 다시 세탁기로 직행하여 조금은 차가워진 햇살을 안고 말랐다. 나만 생각하면 결국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는 것은 내심 반갑다. 대충 입고 나가서 마음 편히 발길 닿는 아무곳에서나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은 물론 조금 아쉽다. 낮기온이 여름과 비슷하더라도 공기의 속성자체가 바뀐터라 추가로 걸쳐 입은 옷이 부담스럽지 않아서도 사실 편하다. 12월의 홍콩이 그랬다. 패딩을 입은 사람과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더라도 몸에 땀이 흐르지도 한기를 느낄수도 없었던 딱 그런 날..
바르보라의 디저트 리투아니아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우는 역사 속 인물이 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라는 대공주와 그의 두번째 부인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이다. 라드빌라이티스 가문은 우리나라로 치면 파평 윤씨나 풍산 홍씨처럼 그 여식을 왕궁에 들인 권세 가문이었다. 바르보라는 아우구스트와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비밀 연애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두번째 부인이 되지만 병으로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죽는다. 그 죽음이 며느리를 싫어했던 이탈리아 혈통의 시어머니의 음모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그로 인해 대가 끊긴 리투아니아에는 마치 상속자가 없는 거대한 기업에 외부 인사가 수장으로 임명되듯 다양한 유럽 출신의 귀족들을 데려와 왕으로 앉히는 연합국 시대가 열린다. 구시가의 가장 드라마틱한 거리 ..
Vilnius 110_1월의 아침 1월6일 오늘은 12월 24일부터 시작된 크리스마스 기간이 상징적으로 끝나는 날로 예수 탄생을 축하하러 찾아 온 3인의 동방박사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의 가정집 현관문에 종종 K+M+B 라고 적힌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방을 의미하는 'Kambarys'의 줄임말인줄 알았다. 절묘하게도 같은 알파벳 세개가 들어가니 막 리투아니아어를 배우기 시작하던 나에게 가장 기본단어중 하나였던 그 단어가 자연스레 뇌리에 꽂힌것이다. 하지만 이 알파벳들은 각각의 동방박사를 뜻하는 Kasparas, Baltazaras, Merkelis 를 뜻한다. 카스파르, 발타자르, 멜키오르의 리투아니아 식 표현이다. 이들 이름의 약자를 1월 6일 대문에 다시 한 번 적는것으로 한 해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
10월의 토닉 에스프레소 빌니우스는 사실 그다지 작지 않지만 중앙역과 공항이 구시가에서 워낙 가까워서 구시가만 둘러보고 돌아가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겐 작고 아담하다는 인상을 준다. 중앙역에 내려 배낭을 매고 호스텔이 있던 우주피스의 언덕을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한때는 꾹꾹 눌러쓴 연필자국처럼 짙고 선명했던 여행의 많은 부분들은 이제 서너장 넘긴 공책 위에 남은 연필의 흔적처럼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역에 내려 처음 옮기는 발걸음과 첫 이동 루트는 한 칸 들여쓰는 일기의 시작처럼 설레이고 선명하다. 몇 일 집을 떠나 머물었던 동네는 공항가는 버스가 지나는 곳이었다. 낮동안 오히려 더 분주하게 날아다녔을 비행기이지만 막 이륙한 비행기인지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인지 그들이 내뿜는 굉음이 오히려 밤이 되어 한껏 더 자유분방해진채로 어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