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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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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리투아니아어 96_광고 Reklama 거리 곳곳의 이런 옥외 광고 덕에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빌니우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거의 알 수 있어서 좋다. 픽시즈는 굉장히 열광하진 않았지만 다른 노이즈락 밴드 음악에 겸해 휩쓸려 꽤 열심히 들었던 밴드인데 이런 밴드가 이곳까지 공연을 하러 오는 게 신기하다. 공연 스케줄을 보니 이틀 후에 스톡홀름 또 이틀 후에 쾰른에 가고 8월엔 매일 도시를 바꿔가며 거의 중노동 수준의 공연을 하신다. 혹시 또 도래할지 모를 코로나 관련 제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요즘 다들 미친 듯이 공연을 하고 또 공연을 보고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광고 문구가 너무 웃기다. 광고 카피를 공연 대행사 마음대로 창작 할수 있는 건지 아님 아티스트와의 협의를 거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픽시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
Vilnius 170_지붕 아래 지붕 아침을 일찍 먹고 밖으로 나갔다. 시장 근처의 놀이터에서 놀다가 비를 피해 시장으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저번에 공원 좌판에서 팔던 리투아니아 전래 동화책을 사려고 했는데 팔렸는지 없다. 비가 오고나면 여기저기에 물이 고인다. 웅덩이에서 놀고 성당 정원에서도 놀았다. 돌아오는 길에 멈춰야 할 곳은 무한하다. 걷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해 걷는 것처럼. 그 사이 토요일 오전의 태양이 성당 건너편에 멋진 지붕을 만들어냈다.
Vilnius 143_눈 오는 일요일 올해만큼 눈이 많이 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면 어김없이 눈이 내려 이미 꽁꽁 얼어버린 선배 눈들 위를 소복히 덮고 또 조금 푸석해지다가 조금 녹기도하며 다시 좀 얼고 나면 다시 내려 쌓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주말 오전에 눈이 내리면 썰매를 끌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주말에는 그저 그렇게 눈이 쌓여있다. 치워지는 것도 애써 내린 눈 본인에게는 피곤한 일이라는 듯이. 너무 급하게 치워진 눈은 모두가 바쁘게 제 할일을 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Vilnius 128_동네 한 바퀴 헤집고 또 헤집고 들어가도 끝이 없는 곳. 전부 다 똑같아 보이는 와중에 항상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는 곳. 그곳에 꼭 뭔가가 있지 않아도 되는 곳. 깊숙이 들어가서 몸을 비틀어 되돌아봤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곳. 너와 함께 헤매는 모든 곳.
Vilnius 124_동네 자작나무 골목 골목을 헤치고 마당안으로 들어서면 생각지도 못한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 지붕너머로 볼록하게 솟아 꽃들이 종처럼 매달린 밤나무가 그렇고 누구집 차고 옆 구석에 무심하게 서있는 라일락이 그렇다. 이 자작나무도 그랬다. 꽤나 컸고 한그루뿐이였고 유난히 하얬다. 제목에 비료자가 들어가는 러시아 노래가 있었는데 정말 찾아내서 다시 듣고 싶다. 예전에 러시아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러시아어 이름을 짓게 했을때 어떤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스스로를 비료자라 불렀다. 횡단 열차 속에서 휙휙 스쳐지나가는 수천 그루의 자작나무를 봤겠지만 오히려 사방의 눈과 함께여서 였는지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모처럼 맑았던 날 어느집 마당에서 만난 자작나무는 또 좀 달랐다.
Vilnius 123_9월의 그림자는 일주일 이상 흐린 날씨가 지속되고 오전마다 비가 내리며 기온이 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걷지 않은 빨래는 젖고 마르고 젖고 축축한채로 며칠을 있다가 운좋게 다시 세탁기로 직행하여 조금은 차가워진 햇살을 안고 말랐다. 나만 생각하면 결국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는 것은 내심 반갑다. 대충 입고 나가서 마음 편히 발길 닿는 아무곳에서나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은 물론 조금 아쉽다. 낮기온이 여름과 비슷하더라도 공기의 속성자체가 바뀐터라 추가로 걸쳐 입은 옷이 부담스럽지 않아서도 사실 편하다. 12월의 홍콩이 그랬다. 패딩을 입은 사람과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더라도 몸에 땀이 흐르지도 한기를 느낄수도 없었던 딱 그런 날..
바르보라의 디저트 리투아니아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우는 역사 속 인물이 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라는 대공주와 그의 두번째 부인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이다. 라드빌라이티스 가문은 우리나라로 치면 파평 윤씨나 풍산 홍씨처럼 그 여식을 왕궁에 들인 권세 가문이었다. 바르보라는 아우구스트와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비밀 연애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두번째 부인이 되지만 병으로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죽는다. 그 죽음이 며느리를 싫어했던 이탈리아 혈통의 시어머니의 음모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그로 인해 대가 끊긴 리투아니아에는 마치 상속자가 없는 거대한 기업에 외부 인사가 수장으로 임명되듯 다양한 유럽 출신의 귀족들을 데려와 왕으로 앉히는 연합국 시대가 열린다. 구시가의 가장 드라마틱한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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