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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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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남자 Tavern Man (2012)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인생 40년을 내 기준에서 두리뭉실하게 나눈다면 구소련 붕괴 즈음의 1990년대까지,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그리고 그 이후의 영화들이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과 핀란드 3부작을 비롯하여 그 트릴로지의 색채가 짙은 영화들이 그 중간을 섭섭치 않게 지탱하고 1990년 이전은 카우리스마키식으로 재해석한 고전들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고약한 영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영화들은 유머의 톤도 조금 달라지고 색감도 비교적 선명하고 따사롭다. 따뜻한 수프에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을 넣어 먹을 때 부들부들해지는 빵처럼 마음이 풀리는 그런 느낌. 는 핀란드 3부작이 끝나고 프랑스의 항구도시 (2011)https://ashland.tistory.com/..
황혼의 빛 Lights in the Dusk (2006)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핀란드 3부작 마지막 작품. 비슷한 시기에 여행했던 헬싱키의 모습이 많이 나와서 반가운 영화이다. 보안업체의 직원인 코이스티넨(얀 히티아이넨)은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깔끔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킬러처럼 공장 건물 지하에서 고독하게 각을 잡고 산다. 저녁에는 학원에도 간다. 상관들은 코이스티넨이 뭔가 못마땅하다. 3년 일했으니 그냥 잘라버리자는 잔인한 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코이스티넨은 어딜 가든 대놓고 따돌림당한다. 그의 무표정은 뭔가 도전적이고 의심스럽다. 주변을 무시하고 으스대고 싶은 어떤 이들에게 그의 눈빛은 당연히 기분 나쁘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어떤 주인공들처럼 코이스티넨도 지금 일하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기 회사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2002)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https://ashland.tistory.com/559090 을 잇는 핀란드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트릴로지로 묶여있는 이 영화를 비롯해서 2000년도 이후의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색감도 훨씬 선명해지고 배경을 롱샷으로 잡는 경우도 훨씬 많아진다. 핀란드 3부작은 어쨌든 핀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이니 그전 영화들에 은근히 남아있던 소련 분위기가 조금씩 없어지고 줄거리도 다소 복잡해진다. 마르카를 내밀며 커피를 사던 주인공들은 유로를 내밀기 시작하고 은행에서 단순히 돈을 인출하는 대신 은행 대출을 받으러 다니고 주인공들에 대한 묘사보다는(어쩌면 이제 우리가 그들을 잘 알아서) 그들이 뚫기 힘든 체계적이고 견고한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프롤레..
떠도는 구름 Drifting Clouds (1996) 이 영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또 다른 트릴로지인 '핀란드 3부작' 혹은 '루저 3부작'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지만 사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정신적인 후속작에 가깝다. 비록 마티 펠론파가 출연하진 않지만 그동안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이전 작품들이 장면장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프롤레타리아 3부작과 루저 3부작을 연결한다. 속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진척 없는 애정문제로 고민하지도 않고 어딘가로 떠나버릴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서 뭔가 달라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사회변화에 가장 취약하고 전환기의 예측불가능한 파고를 가장 깊게 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언젠가 휴대용 카세트와 여행가방을 들고 어딘가로 떠나려..
아리엘 Ariel (1988) 내 멋대로 '카티 오우티넨 3부작'을 만들어서 쓰다 보니 자연스레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영화 . (1986), (1990)와 함께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 들어가는 영화이고 카티 오우티넨은 출연하지 않는다. 이렇게 특정 테마로 한배를 탄 영화들은 감독의 치밀한 구상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작 성향이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분류하는데 재미가 들린 평단의 팬심이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런 분류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 감독의 영화마다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고 또 인물이나 영화자체를 좀 더 낭만화하는 경향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비교적 분명하고 서술적인 다른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제목과 비교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너무나 간단하고 그래서 좀 불친절하다. 도대체 아리엘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영화..
천국의 그림자 (1986) 헬싱키 어딘가. 잔잔한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과 함께 니칸더(마티 펠론파)의 일상이 그려진다. 니칸더는 쓰레기 처리 업체에서 일한다. 그날의 할당된 쓰레기 컨테이너들을 하나둘 비우고 포화 상태가 된 쓰레기 수거 차량을 매립지에서 비우면 하루가 끝난다. 니칸더의 일상은 건전하다. 퇴근 후 간단히 장을 보고 영어 학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제법 정성스레 저녁을 해 먹고 간이 나빠서 도수 높은 술은 안 마신다. 어느 날, 라벨도 안 붙여진 시너병 같은 보드카 병을 들고 코가 빨개진 니칸더의 동료가 다가와서 말한다. 마치 25년 동안 매일 아침 했던 생각이지만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그간의 인생을 전복하겠다는 듯이. 은행 대출을 끼고 트럭 5대를 사서 자기 사업을 시작할 테니 합류하라..
성냥공장 소녀 (1990)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핀란드 여인 이리스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산다. 다 마시고 세척한 것으로 보이는 보드카병이 물병과 꽃병으로 변신하여 여기저기 널려있고 의미 있는 말 한마디 오고 가지 않는 그 차가운 집안을 채우는 것은 긴박한 국제뉴스들이다. 러시아에선 가스 폭발로 열차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죽고 이란에선 이슬람 지도자가 죽고 천안문 사태로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이 죽는 뉴스들이 계속 흘러나오지만 원한다면 그 티브이를 꺼버릴 수 있는 이쪽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다. 세상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는 상관없이 이리스의 일상은 표면적으론 평화로워 보인다. 공장에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저녁이면 퇴근해서 모두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자기 전에 대중 소설을 읽고 주말이면 댄스장에 가서 남자를 기다린다. 쓸쓸하고 생명..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1994) 독서에 침대용책과 화장실용 책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도 프로젝터용 영화와 식사용 영화가 있다... 어떤 영화를 식사용 영화로 분류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한 영화에 던지는 최대의 찬사이자 가장 진솔한 우정의 표시 같은 게 아니려나. 짐 자무쉬, 아키 카우리스마키, 홍상수, 오즈 야스지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고 그 외에도 무수한 영화들이 있다. 식사용 영화 클럽에 들어오는 기준은 사실 간단한 듯 간단치 않다. 또 봐도 재밌다는 게 소름 끼칠 만큼 여러 번 본 영화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플롯이 단순하고 대사가 적고 흑백이면 더 좋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해선 안되며 주인공들의 은근한 속웃음과 수줍은 좌절감 같은 게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