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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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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통역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2003) 24시간을 초단위로 잘개 쪼개어서 그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매순간 머릿속을 파고드는 단어와 소리, 이미지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나가야한다면 어떨까.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리는 그것은 어쩌면 상상을 기반으로 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에 가까운것일지도 모른다. 집밖을 나서서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단어와 섞이는 나의 단어를 포착하고 그들의 눈빛과 감정에 부딪힌 후 돌아오는 나의 오감들을 내 감정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것은 단순한 사유와는 좀 다르다. 각기 다른 감정들을 비슷한 색깔로 분류하고 적정량의 놈들이 모여졌을때 서랍장 입구에 견출지를 붙이는것. 서랍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의 감정을 담아내지 못할때 우리의 감정은 세분화되고 서랍의 개수는 늘어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적절한 단..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퍼시 애들론 (1987) 트렁크와 함께 단 둘이 남겨진 주인공들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들이 방황하는곳은 캘리포니아 사막 한가운데일수도 있고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카페일수도 있다.(그린카드) 때로는 프로레슬링 체육관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반칙왕) 전설의 명검을 지닌채로 강호를 떠돌기도 한다.(와호장룡) 혼자인것에 익숙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그들을 무의식중에 동경하는 내가 가끔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외톨이 같은 그들과 함께 고독의 미학을 깨달아가는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과제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혼자라는것의 정의는 과연 누가 어떤 단어로 내려줄 수 있는걸까. 그것이 100퍼센트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독에 대해 얘기하는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닌가. 마치 설탕이 단지 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충치의 고통에 대해 논하는것처럼 말이..
<텐텐 轉轉 Adrift in Tokyo> 미키 사토시 (2007) 하얼빈에서 1년반정도 기숙사 생활을 한것말고는 혼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자취생활에 대한 로망같은게 있다. 자취생활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무턱대고 동경한다기 보다는 누군가에겐 불가피했지만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갈 곳 없이 방황하다 얼떨결에 정착해버린듯한 의 장기투숙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하숙생들이고 의 춘희도 의 윌리도 의 트래비스도 의 앨리도 의 소년과 소녀도 결국은 근본적으로 자취생들이 아닌가. 물질적 풍요와 안정적 삶과는 동떨어진, 혹은 그것들과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을때에만 오히려 구겨진 신발 뒤축을 뚫고 나오는 듯한 특유의 자유와 의도된 고독. 그리고 그 모든것을 향한 흑백의 냉소들에 철부지 같은 동경을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짧은..
<열혈남아 As tears go by> 왕가위 (1987) 을 보면 뉴욕에 머물던 에바가 숙모가 사는 클리블랜드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장면이 있다.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보낸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미 그녀가 익숙해지고 그리워하게 된것들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데 바로 체스터필드 한 보루를 트렁크에 집어넣으면서 '이 담배, 딴 도시에 가도 있을까?'라고 윌리에게 묻는 장면이다. 낯선 곳으로 떠날때 우리는 늘 우리가 나중에 그리워하게 될 지 모르는것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갑자기 그 음악이 듣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씨디를 굽고 '그래도 머리맡에 놓고 두고두고 읽을 책 한권쯤은 챙겨야지' 하는 생각에 헌책방을 향하고 적응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계산해보고는 삼분카레 세네봉지를 구겨넣는다. 갑자기 보고싶어졌는데 아무곳에서도 다운을 받을 수 없..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1995) 원하는 영화를 그때그때 찾아서 볼 수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것에 감사해야한다. 오래전에 다운받아놓은 영화도 시간과 용량에 구애받지 않고 오랫동안 남겨둘 수 있는 거대한 저장공간이 보장되어있고 정말 재밌게 봤는데 절대 기억안나는 영화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검색엔진과 imdb 같은 사이트들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단역들 이름을 알아내려고 흐릿하게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고르는 재미는 만끽할 수 없지만 연체료 걱정에 황급히 신작 비디오를 돌려줘야 할 번거로움도 없고 월요일 아침에 비디오 반납함 앞에서서 꾸역꾸역 주말 동안 빌려 본 비디오 테잎을 집어넣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방과 후 비디오 가게에 들려 고심고심해서 영화를 ..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 장 마크 발레 (2011) 지난번에 을 보고 바네사 파라디가 떠올랐더랬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조니뎁이 아니고선 독자적으로 잘 거론되지 않는 배우. 그녀를 볼때마다 일종의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조니뎁이 별로 멋있지도 않고 그가 케케묵은 매력으로 수년간 어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니뎁과 그토록 오랫동안 짝으로 지냈었던데에는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것과 심지어 '그렇게 앞니 사이가 벌어져서도 조니뎁과 가정을 꾸릴 수 있다니'라고 더더욱 못난 생각을 하게 되는것. 그러니 앞니가 빠진 여자는 예쁘지도 않고 그런 여자는 멋진 남자와 살 수 없다는 외모지상주의에 근거한 몹쓸 편견에 조니뎁이 멋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그가 사랑한 여자는 뭔가 특별..
<파리 5구의 여인 The women in the fifth > 파벨 포리코프스키 (2011) The women in the fifth 이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났는데 최근 들어서야 내가 본 영화가 이 영화란것을 알았다. 가끔 그럴때가 있다. 뚜렷한 동기없이 우연히 봤는데 재밌었던 영화들에 대해 누군가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그게 무슨 영화인지, 내가 본 영화인지 아닌지 헷갈릴때가 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때 문장성분의 배열때문이었는지 엉뚱하게도 바네사 파라디가 나왔던 가 바로 떠올랐고 제목속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영문 제목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최종적으로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던 이유는 아마 스쳐지나간 에단 호크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이름때문이었을거다. 실제 제작년도는 2011년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개봉을 했다. ..
<비포 선셋 before sunset> 리차드 링클레이터, 2004 before sunset, 2004 다시 쌀쌀해진 날씨. 주말 오후 집에 틀어박혀 론니 플래닛을 뒤적여본다. 비행기표를 워낙에 일찍 사놓아서 여행까지 반년 정도면 기초 프랑스어를 배워도 남겠다고 생각했는데 밍그적거리는 사이에 여행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살 방을 구해 놓은것 말고는 해놓은것도 없다. 지도위에 표시된 축척을 따라 손가락으로 아무리 에펠탑과 개선문 사이의 거리를 재어 보아도 쉽게 와닿지 않지만 이렇게 백지상태에서 내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것이 어쩌면 현재의 나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여행을 하고나면 지금 머릿속으로 그리는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깐. 부록으로 딸린 지하철 노선도를 뜯어서 펼쳐놓고 보니 그나마 방향 감각이 생긴다. 예를 들면 라데팡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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