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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여행과 나중의 여행 가장 여행이 여의치 않은 시기에 넌지시 꿈꿔보는 여행이 가장 심정적으로 가깝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내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런 구체적인 준비 자세도 취할 수 없는데에서 오는 절대적인 자유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여행의 정수는 결국 환상하는 그 순간 자체에 있으며 어떤 대안이나 변화에 대한 갈망은 결국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느끼고자 하는 모든 감각들, 그 모든 것은 사실 현실에서 용이하다. 그것을 애써부정하고 자꾸 미래로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우리가 낭만적이라 느낄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을 굳이 부정하고 거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코 모든것이 꿈같진 않더라 라고 실망하는 순간만 영리하게 피할 ..
빌니우스의 10월과 뻬쩨르의 4월 세수를 하다가 살짝 젖은 소매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 더이상 커피를 시키면서 얼음이 채워진 유리잔을 부탁 할 필요가 없어졌고 카페 바깥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위에는 아침에 내린 빗방울이 달리 어디로 굴러가야할지 몰라 그저 고여있는 그런 형상들. 새벽 햇살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여전히 지저귀는 새들이 있어서 좋다. 통상 이곳의 겨울 난방은 10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 낮 기온이 10도 정도로 3일간 지속되면 시작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지다가도 어느날은 낮기온이 15도를 넘겨버리는 중이라 빌니우스는 아직 난방을 망설이는 분위기이다. 4월의 중순 정도, 이제는 난방 끌만도 해 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장장 6개월간 지속되는 난방이니 만큼 벌써부터 ..
Vilnius 107_지난 여름의 흔적 여름이 끝나다. 여름은 끝났다. 여름이 끝났어요. 여름은 끝났습니다 사이의 뉘앙스에서 학생들이 동분서주하는 사이 여름이 정말 끝났다. 입추 같은 절기를 세는 것도 아닌 이곳에서 보통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여기는 9월 1일. 올해는 1일이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9월 2일이 개학날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돌아 온 사람들, 각자의 도시에서 학업을 시작하러 몰려든 학생들로 도시는 뭔가 꽉 찬 분위기이다. 개학 날 선생님께 드릴 꽃을 손에 쥔 학생들, 대학 신입생들의 과 별 행진, 신고식도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9월이 왔다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 시킨 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거짓말처럼 사라진 집 앞 과일 좌판이었다. 여름 내내 동전을 들고 다니게 했고 딱히 살 과일이 없어..
나의 커피와 남의 커피 개학전에 벼락치기로 일기장을 채워야 한다면 날씨란에 어떤 날씨를 적을까 순간 멈칫하곤 했다. 일기를 검사하는 선생님이라고 해서 그날의 날씨를 알았을까 생각하면 결국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어린시절이었구나 생각한다. 정말 기억에 남았던 날에 대한 일기만을 아주 정성스럽게 적을 생각이었다면 날씨는 물론 입었던 옷 조차 힘들이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을텐데. 다름이 아니라 근래에는 가끔 마시는 커피마다 너무나 맛있어서 커피 일기를 쓰라고 한다면 벼락치기라도 그 커피의 날씨를 다 기억해낼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피의 온도는 물론 커피의 색상부터 그 모든 배경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번 여름에는 에스프레소를 시키며 얼음을 채운 유리잔을 따로 부탁하곤 했다. 커피잔의 반 정도 채워진 고귀한 커피에 설탕을 넣어..
Vilnius 106_풀밭 위의 안나 카레니나 항상 열리는 듯 하지만 또 그런것 같지도 않고 늘 서너명의 같은 상인들이 같은 물건들을 팔고 있는 것 같지만 또 꼭 그런것 같지도 않은 것이 구시가의 작은 벼룩시장. 나 또한 봉지에 싸 온 사과와 함께 차를 홀짝이며 잡담하는 저 상인들에게는 그냥 매 번 훑어만보고 지나가는 아는 얼굴의 영양가없는 손님일뿐인지도 모른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닐 것이고 일부는 마치 본 적도 없는 듯 잊혀졌고 또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어느날 갑자기 눈에 띄기도 하고 그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우연히 특별한 의미로 남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지나쳐서 익숙한 것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순간에 도달해야만 그제서야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은 전부 그렇고 그런것이라 생각하게 되지만 그래도 또 들여다보게 되..
Green book (2018) 요새 대성당 근처를 자주 가게되서인지 올 초에 본 이 영화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아른. 이 영화가 대성당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고 대성당 앞에 있는 KFC 때문이다. 영화 속의 우아하고 고고한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살라 알리)는 투박하고 거친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비고 모텐슨)를 통해서 KFC 라는 신세계를 알게된다. 치킨을 그냥 맨 손으로 먹는 것은 둘째치고 먹고 난 치킨뼈를 운전 중 차창 밖으로 보란듯이 내다 던지기까지 하는 토니의 행동에서 피아니스트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이동 중 차 안에서 먹는 치킨은 곧 그들의 일상이 된다. 내 원칙에 상반된다고 생각해서 뭔가를 거절해야할 것 같은 순간은 사실 많지만 딱히 그런것이 아닌데도 괜히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키게 했다거나 나의 ..
Vilnius 105_새로운 의자 지난 달 리투아니아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다. 얼마 전의 대성당 광장은 사열한 군인들로 가득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합동참모의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멀리서도 합참의장과 악수하는 키 큰 대통령이 보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대성당 광장의 바로 이 위치에 새로 생겨난 이 벤치들이었다. 요새 빌니우스시가 빌니우스 곳곳에 관광지가 아닌 일반 동네 공터에도 속속들이 설치하고 있는 나무 벤치.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벤치들 중 일부는 500 유로에서 1000 유로 정도 내면 1년, 1000 유로에서 5000 유로를 내면 10년, 5000 유로 이상을 내면 50년 가까이 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을 내고 도시의 벤치를 임대한다는 것은 그러니 일종의 기념 벤치 사업 같은 것으로 일정 심사..
Vilnius 104_주전자 거리 여행객들의 잡담소리, 노천 테이블 위의 접시에 내리 꽂히는 맛있는 칼질 소리, 거리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필리에스(Pilies) 거리 특유의 북적거림에서 갑작스런 음소거를 경험하고 싶을때 가장 먼저 숨어들 수 있는 베르나르디누 Bernardinu 거리. 셰익스피어가 머물거나 했던 역사는 절대 없지만 어쨌든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호텔과 여러 조각 작품들이 숨겨져 있는 꽤나 정겨운 마당들로 이루어진 꼬불꼬불 재미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이 거리의 초입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도자기 차 주전자들. 이미 오래 전에 와인샵이 되었지만 실제로도 저 가게는 향긋한 차와 커피를 덜어파는 매우 아기자기했던 장소였다. 이런 아늑하고 달콤한 곳이라면 일년 내내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겨울이어야만 할 것 같았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