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원한 휴가

(931)
Vilnius 108_오후 4시의 하늘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 푹 빠져들 수 있는 어떤 생각들과 풍경들이 있다면 그 기다림이란 것이 사실 그리 지겹고 버거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내 차례가 거의 다가왔을 때 일부러 또다시 은행의 번호표를 뽑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이 바빴던 누군가는 몇 초간 머물다 그냥 넘어가는 전광판의 나의 옛 번호를 보고 잠시 행복해했겠지. 그리고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번호들을 보았을 땐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며 속으로 웃곤 했다.
Virgin mountain (2015) 핑크색으로 쓰인 영화 제목이 전체적으로 차갑고 엄격한 포스터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며 눈에 확 들어왔다. 난 이 포스터를 보고 이 영화가 무슨 현대판 무소르그스키 전기 영화쯤 되려나 생각했다. 레핀이 그린 빨간 코 무소르그스키와 너무 닮지 않았는가. 비록 남자는 술 대신 우유를 들고 비교적 말끔한 차림새에 또렷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왠지 무소르그스키의 인생 말미가 떠올라서 서글퍼졌다. 제발 우유를 든 이 남자의 삶은 순탄하기를 바랐다. 이 영화는 공항의 수화물 파트에서 일하는 남자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헤비메탈을 즐겨 듣고 금요일마다 태국 식당에 가서 팟타이를 먹고 전쟁 장면을 재연하는 미니어처들을 섬세하게 손질하며 여가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우유에 시리얼 말아먹기를 좋아하는 남자..
오후 4시의 커피 빛이 어둠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날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도 점심을 먹고 나서도 저녁을 먹을 즈음에도 주위의 빛깔은 한결같다. 나의 경우 1년을 쪼개고 또 쪼갰을 때 가장 선명하게 남는 것은 겨울이다. 돌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은 여행지에서 그 여행을 마음껏 기다리던 순간의 설레임이 오히려 그리워지듯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떠올리게 되는 풍경은 결국 그 여름을 원없이 열망할 수 있었던 긴긴 겨울이다. 코코아와 카푸치노를 채운 우유 거품이 가장 포근하게 느껴지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Stockholm (2018) 스톡홀름의 찻집에서 친척언니가 사다 준 홍차통이 있다. 그래서 부엌에 가면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 스톡홀름의 정경과 매일 마주친다. 여름인가 카페에서 읽은 커피 매거진 속의 스톡홀름의 카페들도 가끔씩 떠올린다. 아마 그래서 이 영화제목이 눈에 들어왔을거다. 하지만 영화를 봐야겠다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에단 호크 때문이었다. 브래드피트와 디카프리오, 조니뎁 혹은 크리스챤 슬레이터가 한창 젊었을때 내가 좋아했던 그 또래의 청춘 스타는 에단 호크였다. 포스터 속의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저 인물이 과연 에단 호크가 맞는지 재차 확인해야했다. 여전히 많은 작품을 하고 있고 나이든 지금의 모습에 익숙해졌음에도 알아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가 심지어 은행 강도 역을 맡았다는것..
Arctic (2018) 추운 영화 좋다. 누가 나왔어도 봤겠지만 매즈 미켈슨이 나와서 더욱 기다렸다 봤다. 사실 그가 이 영화에 몹시 잘 어울릴것이라는 예감 자체가 영화의 첫인상이다. 이 배우가 어떤식으로 처절하게 고생하는지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즈음에서 재난 구조 영화 한 편 찍으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라는 제안을 받은 매즈 미켈슨이 현장에 도착해서는 산악용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빨간 패딩을 입혀주는 스텝을 향해 팔을 벌린채 몇 문장 안되는 대사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 내내 대사없이 누워있는 여배우를 제외하면 유일한 등장인물인 그는 단 한 벌의 의상을 입고(심지어 나중에는 그마저도 손수 불태우며)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짧은 대사를 내뱉으며 북극의 설원을 고독하게..
Le Havre (2011)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일러스트를 타이틀 커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체제작한 커버들이 대부분 개성있고 인상적이지만 이렇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귀엽기까지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전부를 갖고 싶다. 소품 같은 영화, 마치 일요일 오후 2시경의 EBS 세계의 영화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어 이 영화 심상치 않은데 하면서 부랴부랴 공비디오(라니 어느 시절 이야기인가)를 집어 넣고 녹화 버튼을 누르게 했던 영화들처럼,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무덤덤한 유머로 살짝 스치고 건드리며 가볍게 풀어내는 감독 특유의 재주, 사연이 많은 주인공들이지만 스스로를 향한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고 관객에게도 그런 인물들을 향한 편파적이고 인위적..
11월의 오늘은 11월 날씨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진작에 마쳤는데 이즈음 날씨가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겨울. 마치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설 채비를 하다가 가까스로 잊은 겨울을 떠올리고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까 신고 들어갈까를 생각하다 지체 되어버린 시간처럼. 너무 따뜻하다는 방정맞은 말로 아직 서두르지 않는 이 추위를 앞당길 생각은 없다. 늘상 그런 말들은 댓가를 치르곤 하지. 하늘은 조금씩이지만 능청스럽게 검어진다.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를 열기를 툭툭 건드리며 살살 돌려서 빼낸 전구다마를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침침해진 방 한가운데에 서있는 느낌. 이곳의 날씨는 나를 아주 단순하게 만든다. 조금씩 지하 터널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짧아지는 낮을 떠올리다 고작 한 달 앞으로 다가 ..
Saint amour (2016) 개인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술 특히나 와인에 관한 영화들은 보통 재밌다. 음식 영화도 그렇고 어떤 요소들이 이런 영화들이 재밌고 유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처받을 걱정없이 어떤 대상을 마음껏 찬양하며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내는 주인공들과 그 대상을 통해 그들이 위안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서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행복하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대화 속에서 어느정도 공통분모를 찾을때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단연 영화 사이드웨이 (https://ashland11.com/90)이다. 사이드웨이를 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