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원한 휴가

(907)
Arctic (2018) 추운 영화 좋다. 누가 나왔어도 봤겠지만 매즈 미켈슨이 나와서 더욱 기다렸다 봤다. 사실 그가 이 영화에 몹시 잘 어울릴것이라는 예감 자체가 영화의 첫인상이다. 이 배우가 어떤식으로 처절하게 고생하는지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즈음에서 재난 구조 영화 한 편 찍으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라는 제안을 받은 매즈 미켈슨이 현장에 도착해서는 산악용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빨간 패딩을 입혀주는 스텝을 향해 팔을 벌린채 몇 문장 안되는 대사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 내내 대사없이 누워있는 여배우를 제외하면 유일한 등장인물인 그는 단 한 벌의 의상을 입고(심지어 나중에는 그마저도 손수 불태우며)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짧은 대사를 내뱉으며 북극의 설원을 고독하게..
Le Havre (2011)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일러스트를 타이틀 커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체제작한 커버들이 대부분 개성있고 인상적이지만 이렇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귀엽기까지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전부를 갖고 싶다. 소품 같은 영화, 마치 일요일 오후 2시경의 EBS 세계의 영화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어 이 영화 심상치 않은데 하면서 부랴부랴 공비디오(라니 어느 시절 이야기인가)를 집어 넣고 녹화 버튼을 누르게 했던 영화들처럼,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무덤덤한 유머로 살짝 스치고 건드리며 가볍게 풀어내는 감독 특유의 재주, 사연이 많은 주인공들이지만 스스로를 향한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고 관객에게도 그런 인물들을 향한 편파적이고 인위적..
Saint amour (2016) 개인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술 특히나 와인에 관한 영화들은 보통 재밌다. 음식 영화도 그렇고 어떤 요소들이 이런 영화들이 재밌고 유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처받을 걱정없이 어떤 대상을 마음껏 찬양하며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내는 주인공들과 그 대상을 통해 그들이 위안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서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행복하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대화 속에서 어느정도 공통분모를 찾을때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단연 영화 사이드웨이 (https://ashland11.com/90)이다. 사이드웨이를 본..
A Better life (201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을 보다가 머릿속으로 급소환 된 프랑스 영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 엄마 면회 장면이 발단이었다. Guilliaume Canet. 매번 구일리아움? 귈레르메? 뭐 이렇게 저렇게 읽다가 얼굴을 봐야 아 기욤이였지 하고 뒤늦게 인식하게 되는 이 프랑스 배우. 나름 원어를 최대한 살린 한국식 표기이겠지만 왠지 프랑스 시골에 가서 당신 나라의 유명한 배우 기욤 까네 알아요 하고 현지인과 나름 친해지겠다고 이름을 내뱉으면 정말 아무도 못알아들어서 멋쩍어질 것 같은 배우 기욤 까네가 출연한 프랑스 영화이다. 헥헥. 사실 그가 요리사로 나왔던 어떤 영화를 이전에 본적이 있어서 아 혹시 이미 본 그 영화인가 긴가민가 하며 보기 시작했지만 풀죽은 월급쟁이 요리사가 자기 식당을 차려서 희망찬 삶을 시작..
Winter sleep (2014) 입속에서 제목을 읊조리마자 단번에 마음에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코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 오래 전에 이 터키 감독의 다른 영화를 재밌게 본 기억도 있지만 제목에 겨울이 들어간다니 무조건 마음에 들었다. 세상 모든 곳의 어떤 추위가 기본적으로 공감과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겨울과 추위들을 많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서도 좀 더 풍부하고 산문적인 감정으로 보존하고 싶은 욕구도 있는듯하다. 길고 지루한 겨울임에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그곳에서 짧고 찬란한 여름 이상의 빛과 따사로움을 맛보고 싶은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이 한 장의 포스터는 영화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포착했다. 포스터의 첫인상은 어느 소인국의 버려지고 황폐한 성을 걸리버 같은 사람이 케익인줄 알고 가져..
Greenberg (2010) 부산 국제 영화제 상영작들 구경하는데 노아 바움백의 신작 Marriage story 가 눈에 들어왔다.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가 의외로 어울리는 부부 포스를 풍기며 아이를 사이에 두고 누워있는 포스터였는데 12월 초에 넷플릭스에서 해준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 우후후. 그린버그 Greenberg 이 영화는 프랜시스 하 (https://ashland11.com/323) 의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의 초기작이다. 언제 이들이 다시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협업할 일이 있을까 싶을만큼 완전히 독립해서 소피아 코폴라만큼 성장하고 있는 그레타 거윅이지만 이 작품은 몇몇 작품을 통해 보여진 그들의 케미스트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조심스레 훔쳐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하다. 감독적 역량 뿐만아니라 그 개..
바다를 향하는 커피 9월의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을때 머리속에 떠오른것은 을씨년스럽고 외롭기 짝이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흑백의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이라면 좋았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바와 윌리와 에디가 마주한 텅 빈 바닷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다 생각하니 급속히 바다가 가고 싶어졌다. 9월의 발트해는 12월의 동해 만큼 차갑겠지. 한여름의 붐비는 바다, 시원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뜨거운 모래 사장에서 햇살을 만끽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없으니 어쩌면 다행이다. 신발만 젖지 않았으면 좋겠다. 젖은 양말속에서 불어서 얼어버리는 발가락은 너무 절망적이니깐. 왠만해서는 뭔가를 미리 예약하지 않게 된다. 새벽 일찍 샌드위치까지 만들어서 첫차를 타러 기차역에 갔는데 일반석표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딱 필요한 명수 만..
10월의 토닉 에스프레소 빌니우스는 사실 그다지 작지 않지만 중앙역과 공항이 구시가에서 워낙 가까워서 구시가만 둘러보고 돌아가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겐 작고 아담하다는 인상을 준다. 중앙역에 내려 배낭을 매고 호스텔이 있던 우주피스의 언덕을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한때는 꾹꾹 눌러쓴 연필자국처럼 짙고 선명했던 여행의 많은 부분들은 이제 서너장 넘긴 공책 위에 남은 연필의 흔적처럼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역에 내려 처음 옮기는 발걸음과 첫 이동 루트는 한 칸 들여쓰는 일기의 시작처럼 설레이고 선명하다. 몇 일 집을 떠나 머물었던 동네는 공항가는 버스가 지나는 곳이었다. 낮동안 오히려 더 분주하게 날아다녔을 비행기이지만 막 이륙한 비행기인지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인지 그들이 내뿜는 굉음이 오히려 밤이 되어 한껏 더 자유분방해진채로 어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