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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과학의 날의 파블로바

 

 
몇 년 간 친구의 생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여 매번 그 주변의 날들에서 서성이며 두리뭉실 축하하다가 작년인가는 간신히 기억해 낸 그 날짜가  어딘가 익숙하여 생각해 보니 4월 21일 과학의 날이었다. 산속에 위치한 중고등학교를 다닌 관계로 과학의 날이 되면 우리들은 대학 캠퍼스의 모나지 않은 널찍한 바위들을 하나씩 전세내고 앉아 과학 상상화를 그리던가 과학 글짓기를 하던가 날아다니는 벚꽃을 잡으러 다니던가 그랬다. 이제 30세가 된 리투아니아 친구는 자신의 생일이 한국의 과학의 날로 인해 잊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나는 내가 리투아니아에 처음 왔을 때 그가 고작 13살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신기했다. 하지만 같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식의 어른스러운 말을 적용하기엔 우리가 영원히 철이 들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침에 출근하여 삼백 밀리 남짓한 샴페인을 사서 식당 냉장고에 넣어 놓고는 직장 근처의 커피 매장에 오래전에 봐뒀던 손잡이 없는 도자기 커피잔을 사러 갔다. 공원에서 샴페인을 부어 마신 후 각자 한 개씩 가지려고 했으나 정작 매장에는 없어서 사지 못했다. 직원은 미안하다며 매장 안의 많은 기계 중 하나에서 종이컵에 커피를 내려 주었다. 직장 근처에 새로 문을 연 파블로바 전문점에선 테이크 아웃을 말렸지만 한 시간 안에 먹는다면 그래도 먹을만할 거라며 대신 과일 베이스보다는 덜 무너질 초콜릿 맛을 권했다. 과학의 날의 날씨는 세월도 나라도 초월하여 정말 좋았다.  트롤리버스를 탄 파블로바는 이전의 우아한 자태는 완벽히 상실한채로 구시가의 공원까지 행차했고 샴페인은 커피 향기가 남아있는 종이컵에 담겼다. 그 순간엔 5호선 종로 3가의 악기 상점 근처의 노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밑바닥의 누런 종이를 반쯤 젖힌 카스텔라와 함께 종이컵에 막걸리를 들이켜시던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생일날 혼자 영화 보는 의식을 치르는 친구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대낮의 홍조를 감추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떠났다. 나는 책 한 권을 수령하려 대성당을 향했다. 딩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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