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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84_옛 주차장 구청사에서 새벽의 문을 향하는 짧은 길목. 이곳은 종파가 다른 여러 개의 성당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러시아 정교와 카톨릭 성당, 우크라이나 정교 성당을 등지고 섰을때 보이는 볼록 솟아오른 쿠폴은 바로크 양식의 카톨릭 성당이지만 화려한 제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내부 장식이 남아있지 않은 성 카시미르 성당의 것이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바뀌며 양파돔이 얹어지고 내부의 화려한 바로크 장식을 걷어내야 했던 이 성당은 소비에트 연방시절엔 급기야 무신론 박물관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평범한 건물도 세월이 흐르면서 소유주가 바뀌고 상점으로 쓰였다가 여관이 되기도 하고 카페가 되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듯 점령자의 필요에 의해 때로는 와인창고가 되고 원정에 나선 군대의 병영으로 쓰여졌던 교회의..
리투아니아어 55_전당포 Lombardas 항상 이 단어를 보면 이탈리아의 롬바디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떠올리곤 괜히 따스해지고 뭔가 넉넉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들 단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롬바르다스는 전당포이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구시가를 걷는다면 옷가게든 빵집이든 한 번에 알아봄직한 상점들 사이에 별다른 간판도 없이 영업하고 있는 전당포들을 간혹 마주칠 수 있다. 특히나 부엌 찬장 속의 마지막 남은 싸구려 숟가락 마저 전부 저당잡히고 영혼이라도 꽁꽁 싸매서 가져다 줘야 할 것 같은 후미진 전당포가 구시가의 트라카이 거리에 하나 남아 있다. 바사나비치어스 거리에서 주욱 내려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들어설 수 있는 거리이다. 건너편 상점들의 조명이 반사된 탓에 속이 쉽사리 들여다보이지 않는 이곳은 ..
Vilnius 83_카페 풍경 요즈음 빌니우스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캠페인. 펄펄 끓는 커피 포트나 다리미, 떨어져서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들을 배경으로 폭발 일보 직전의 자신을 뒤돌아보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커피 포트가 뿜어내는 연기가 불안감을 주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 문을 연 카페의 오렌지색 간판 때문에라도 구시가의 어떤 장소보다 이곳에 가장 잘 어울린다.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거리, 행인들이 안겨주고 가는 꽃다발로 한시도 외로울 틈 없는 로맹 개리의 동상과 러시아 드라마 씨어터가 자리잡은 바사나비치우스 거리이다. 문화부나 리투아니아 철도청 같은 주요 관공서들이 유서 깊은 건물들에 터를 잡은 꽤나 진지하고 격조있는 거리인데 이곳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몇몇의 거리들을 통해 곧장 빌니우스 대학과 대통령궁, 대성당까지 닿을 수 있음에..
Vilnius 82_창 밖 풍경 병원 복도를 무심코 지나치다 다시 되돌아가서 마주선 풍경. 새롭게 생긴 창이 아닐텐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 굴뚝과 건물의 능선들을 이제서야 알아본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주홍 지붕을 감싸안은 하얀 눈과 겨울 아침 특유의 잿빛 하늘이 간신히 포섭해 놓은 성 카시미르 성당의 쿠폴. 매년 3월의 첫 금요일, 구시가 곳곳에서는 성 카시미르의 축일을 기념하는 큰 장이 열린다. 성당의 쿠폴속으로 아낌없이 쏟아지던 어느 해 장날 아침의 하얀 햇살이 기억난다.
양양 큰아버지네 집 마당에서 참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자주 못 만난다. 자주 못 간다. 그런 표현들. 그런데 내가 경험할 수 있는 횟수가 어렴풋이 이미 정해져 있는듯 보이는 그런 상황들이 있다. 김치를 담그지는 않지만 이를 테면 김장 같은 것. 여권 갱신 횟수 따위들. 한국에 가는 일 같은 것. 그런것들을 떠올리고 있으면 자주 라는 단어는 힘을 잃는다. 모든 것이 이미 내 인생 속에서의 정해진 횟수 중의 한 번 이라는 이미 고정된 찰나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기억에 더해지는 한 번이 아닌 뺄셈으로 사라지는 한 번의 뉘앙스가 때로는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시골 큰 집의 장독대는 이번에도 다른 색이었다. 그것도 내가 많이 좋아하는 색.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드나들 곤 하는 집안 구석구석을 항상 열심히 칠하고 돌보시..
리투아니아어 54_Gyvenimas 인생 제목을 쓰기 전에 검색을 해보았다. 이 단어에 대해 과연 아직도 쓰지 않았을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습관적인 단어이고 그 단어를 쓰는 우리의 자세는 단어 자체의 울림에 비하면 오히려 한없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볼레벤이라는 독일 작가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는 '나무 수업'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신비로운 나무의 일생'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다. 뭔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가히 수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어 최종 제목을 두고 출판사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판매 부수에 좀 더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어를 궁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숲을 거닐며 이 나무 저 나무에 청진기를 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상상된..
순두부찌개 돌아오기 전 날 저녁 엄마가 끓여준 순두부 찌개를 보니 돌아와서 처음 끓였던 어떤 국이 생각난다. 고깃국을 끓이다가 간장을 좀 넣었는데 맛이 시큼해졌다. 뭘까. 싸구려 간장이라서 그런가. (키코만 간장이 아니면 대부분은 좀 구리다. 하인즈가 만든 간장도 예외는 아니다.) 혹시 무가 상했던건가. 고기가 상했나? 차라리 간장을 더 넣어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서랍을 열고나서 간장 대신 발자믹 식초를 넣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몰랐다.
겨울의 카페 케익의 첫인상은 항상 작다. 스모 선수를 보지 않아도 그는 거대할것이라 짐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맛없을 케익도 그는 항상 작게 느껴진다. 그 케익을 커보이게 하는 유일한 존재는 작은 데미타세 잔이다. 작은 에스프레소가 가져다 주는 희열이라면 어떤 케익을 먹어도 보통은 그 보다는 크다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케익을 다 먹었는데도 커피가 남아있는것이 싫다. 커피가 부족하다고 느끼는것이 훨씬 더 정당하다. 커피는 새로 마시면 되니깐. 겨울의 카페는 두 종류이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가는 카페가 늘 그렇듯 그 중 하나이겠고 하나는 단지 추워서 들어가는 카페이다. 오후 8시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중. 이대로 집까지 걷다간 죽을 것 같아 몸을 좀 녹이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다. 물론 장갑을 벗고, 모자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