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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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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50센트 동전, 빈 분리파, 클림트 이렇게 똑같이 생겨서 심지어 태어난 해도 같은 생소한 동전들이 서로 떨어져서 굴러다니고 있으면 다른 것들을 옆으로 제쳐 두고 만나게 해주고 싶다. 이 동전은 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 같기도 하고 중동의 사원 같기도 하다. 근데 막상 왕의 묘지라고 생각하면 좀 너무 뻔하다. 가령 왕은 되지 못했으나 후대에 오래도록 회자된 덕망 있는 대군의 묘지라든가 할머니 무릎 위에 올라앉은 세손을 나무라는 며느리 중전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인자한 대왕대비마마처럼 왕의 주변에 머물 뿐이었지만 훌륭한 능을 가져 과연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묘처럼 뭔가 다른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아마 동전에 새겨지는 것이 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명한 정점의 과거만은 아님을 ..
도서관에서 차 한 잔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장갑은 확실히 안 껴도 되고 5개월을 주야장천 입었던 제일 따뜻한 패딩도 이제는 드디어 세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계속 비가 오고 있는 걸로 봐선 내일부터는 분명 또 기온이 내려갈 것이다. 오늘의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따뜻하고 서머타임도 시작되어 어제의 22시는 오늘의 23시가 되었다. 며칠 후면 내가 빌니우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주간이다. 그때 게디미나스 언덕에는 찢은 론리플래닛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녹지 않고 얼음 결정이 되어가는 단단한 눈들이 가득했었고 어떤 날은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호스텔 접수창구(?) 아주머니에게 우산을 빌려서 돌아다녔었다. 17년 전보단 확실히 따뜻해졌지만 날씨의 패턴은 여전히 비슷하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바깥으로 테이블을 내다 놓기 ..
동네식당의 라그만 우리 동네 베트남 식당이 안타깝게도 문을 닫아 일 년간 비어있던 자리에 할랄표시가 붙은 꽤 진지해 보이는 무슬림 식당이 생겼다. 새로 생긴 식당의 운명이란 것이 음식이 맛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손님이 많아지면 처음과 달리 뭐가 변해도 변하게 되니 최대한 빨리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순간 한번 정도는 꼭 가보게 된다. 이 식당 건너편에는 십 년도 끄떡없는 아르메니아 식당이 있고 이 골목의 끝에는 작년 여름에 생겨 성업 중인 케밥집이 있는데 이들은 보기 좋게 삼각편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식당들 특유의 동향들의 커뮤니티 같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 낯섦은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을 하다가 알게 된 현지인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얼떨떨하면서도 푸근하다. 카이로의 시리아 대사관 앞에..
동네카페의 셈라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어서 통계적으로 가장 자주 가는 동네 로스터리 카페. 2년 전에 중국 대사관 옆의 허름했던 건물이 재단장을 하더니 스타트업이 들어섰고 카페도 동시에 문을 열었다. 카페가 정상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물론 최근 1년 사이다. 작년에 생긴 공유 오피스가 카페 내부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간혹 가볍게 입고 노트북만 들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 대학 동기가 살던 대형 고시원의 휴게실이 떠오른다. 대형 고시원들이 다 그랬던 건지 전기밥솥에 담긴 쌀밥이 기본 옵션이었는데 한동안 친구 준다고 반찬 가져다 놓고 거기서 친구랑 밥을 많이 먹었었다. 이 카페에 아침 일찍 가면 빵을 공급하는 조그만 배달차량이 도착하는데 그 차량이 떠나고 나면 정말 단 시나몬바브카나 라즈베리잼이 들어있는 ..
토요일 오전의 더블 에스프레소 게디미나스 대로에서 중앙역을 향하는 모든 탈 것들은 한대도 빼놓지 않고 이 카페 앞에서 커브를 돌아 좌회전을 한다.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는데 도로에 면한 카페 치고는 바깥 공간도 가장 넓다. 이 축복받은 남서향의 카페는 구시가 내에서도 단연 일조량 최고이다. 지난 1월 한 달 빌니우스 일조량이 4시간 남짓이었다는데 아마 그 4시간의 희소한 햇살을 이 카페는 일초도 남김없이 온전히 누렸을 거다. 카페 앞에 횡단보도가 있어서 사방에서 꼼짝없이 신호에 걸리는 이들을 구경하기에도 좋다. 어떤 차량은 마음이 앞서 첫 번째 허들을 넘어뜨릴 만큼 앞서 뛰쳐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뒷주자의 경적을 듣고서야 느릿느릿 움직인다. 하지만 이 카페의 커피가 분명 맛있음에도 자주 가진 않는다. 커피가 맛있..
리투아니아어 101_Kasos juosta 감열지 오랜만에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 동생, 이런 거 뭐라고 하니 한국말로? 영수증 출력되는 거. - 빌지. 정식명칭은 감열지 지난 금요일 오후에 주말 동안 이 물건이 부족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동료가 문자를 보내왔다. 월요일까지 분명 충분할 것 같지만 신경 써서 알려주는 어린 동료가 기특하기도 하고 그런 예고들은 또 이상하리만치 적중할 때가 많으므로 토요일 이른 아침 가져다 놓기로 했다. 트롤리버스 안에서 무릎 위에 이들을 놓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걸 뭐라고 하는지 정작 한국어로는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서 식당을 했던 동생에게 물었더니 감열지라고 했다. 빌지는 학생 때 아르바이트하고 그럴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는데 감열지라니 아마 이 단어를 누군가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었더라면 뭔지..
겨울을 사랑한다면 3월에도.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심지어 소곤 될 것인지 혹은 박장대소할 것인지에 따라서도 가고 싶은 카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옷장의 검은 옷들이 저마다의 검음으로 망설임을 유발하고 기름 종이 한 장 차이의 구름의 채도가 고만고만한 비옷들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하듯 빌니우스의 몇 안 되는 카페들도 나에겐 그렇다. 극장 앞에 위치한 이 카페는 왜인지 겨울에만 집중적으로 가게 된다. 보통의 카페의 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상현달처럼 보여주지만 이곳의 넓은 통유리창은 구시가를 향해 미세한 가속도가 붙어 하강하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을 제법 완전하게 보여준다. 케이블을 붙들고 언덕을 오르는 트롤리버스의 꽁무니를 따라가다보면 소실점에 걸쳐있는 어린 로맹 가리의..
Poland 15_바르샤바 지브롤터 오브 마인드 바르샤바 가기 전에 카페 검색 했을 때 이름 때문에 기억에 남았던 유일한 카페였는데 공교롭게도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카페여서 두 번을 갔다. Stor라는 이 카페는 아마 스톨리치나야 보드카 때문에 혹은 저장의 어감 때문에 혹은 뚱뚱하다는 리투아니아 형용사 Storas의 느낌이 혼존하여 뭔가 동글동글 귀엽게 취한 듯한 인상이 있었다. 실제 카페는 여러모로 익숙했다. 빌니우스였어도 베를린이었어도 서울이었어도 자연스러웠을거다. 방문객들은 저마다의 바지통 넓이로 경쟁하고 쉬프트 알트 한 방으로 언어 변환을 하듯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정신없이 옮겨 다녔다. 주말이여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 카페에는 보통의 마키아또나 코르타도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지브롤터라는 메뉴가 뾰족한 바위산처럼 자리 잡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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