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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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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모리스 모리스라는 이름의 보라색 토마토가 팔길래 한 개 사와서 먹었다.
Vilnius 160_조심히 걷기 10미터 정도 앞에 먼저 가고 있던 남자가 꽈당 넘어지길래 반대편 길로 가서 걸음을 이어갔다. 언젠가 나의 미끄러짐도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었겠구나 싶어 마냥 창피한 행위는 아니란 생각이 들며 괜시리 마음이 편해지면서 앞서 넘어진 남자의 겸연쩍은 뒷모습을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지붕으로부터 물이 떨어져 거리에 쌓인 눈에 꽂히는 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비슷하다. 계속 뒤에 누가 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거리엔 혼자였다. 제법 밝아졌고 어느새 2월이 되었다. 이 길에서 나는 보통 왼쪽 길로 꺾는다.
장르만 로맨스 (2021) 2019년 가을. 빌니우스 우주피스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는 모습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이따금 구름이 몰려오긴 했지만 9월의 날씨는 찬란했다. 만약 그날의 날씨가 가을 빌니우스의 일반적인 음울 우중충 모드였다면 엔딩에 등장하는 두 작가의 만남은 먹먹하고 무겁게 느껴졌을거다. 돌이켜보니 그날의 날씨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처음 크랭크인 할때의 가제는 입술은 안돼요 인걸로 알고 있었는데 장르만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결과적으로는 잘 바꾼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은 어색하게 코믹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부분이 복고적이고 클래식하게 다가왔다. 배우 류승룡은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캐릭터를 구현해내는데 탁월한 것 같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염력' 같은 작품속의 인물들이 내겐..
미성년 (2019) 얼마 전 모가디슈를 보고 배우 김윤석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모가디슈 같은 대작을 만드는 일은 감독으로서 너무 힘든 일일 것이라며 자신은 그냥 지금처럼 작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모가디슈는 상습적으로 대작을 만드는 감독들도 만들기 쉬운 영화는 아닐것으로 보여지지만) 그래서 나는 그의 작고 잔잔한 두 번째 영화를 몹시 기다리는 중. 미성년.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한편으론 정말 상관있다. 소설에도 무책임한 어른들 여럿 나오니깐) 작년에 본 영화인데 생각난 김에 뜬금없이 짧게 기록해 놓기로 한다. 배우가 만든 영화여서일까. 배우 기용에 있어서도 재치가 넘쳤고 모든 배우들이 동료 배우의 감독 데뷔작을 위해 으싸으싸 하는 느낌이 들었다..
India 09_바라나시의 아침 잊기 힘든 중요한 날도 가끔은 정신없이 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인도에 도착한 1월17일이 되면 그 날짜는 마치 꺼도 꺼도 꺼지지 않는 알람처럼 하루 온 종일 가슴속에서 울려댄다. 난 참으로 좋은 여행을 했다. 그때도 매순간 그걸 알았다. 그래서 참 슬펐다. 그것은 행복의 극단에서 모든 것이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인식할때 찾아오는 우울이다.
Vilnius 159_오후의 성당 그제부터 오늘까지 매일 아침과 저녁 눈 위에 모래를 뿌리는 성당지기를 스쳤다.
1월의 핫초콜릿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 중에 스모우크핫커피리필 이란 노래가 있다. '스모우크.핫.커피리필, 달이 뜨지 않고 니가 뜨는 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그런데 유독 커피도 아닌 핫초콜릿을 마실 때 이 노래가 보통 떠오른다. 하루하루 가장 짙은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12월에 온 정성을 다해 끓이는 한 잔의 핫초콜릿은 남아있는 온 겨울을 녹여줄 듯 짙고 따뜻하지. 그래서 1월만 되어도 별로 맛이 없는가 보다. 그러니 이것은 오히려 약발이 떨어진 핫초콜릿 속에 달 대신 떠오른 예쁜 마쉬멜로우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2021 년의 햇살 낮이 급격히 짧아지고 어둠이 어둠 그 이상으로 어두워져서 이 시각 이 계단에 내리쬐던 이 햇살을 보려면 해를 넘겨서도 더 많이 기다려야한다. 그 순간을 계절과 시간으로 특정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아 이 느낌이었지!' 하고 어떤 기억이 온 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순간에 도달하려면 사실상 딱 저 자리에 위치하는 순간과 함께 아주 까다롭고 미세한 조건들이 충족 되어야한다.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전선들 아래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따라 오래된 먼지와 담배 꽁초가 나뒹구는 계단이지만 층계참에 남쪽 건물 마당을 향해 내어진 창은 여지없이 이 햇살을 끌어와선 단단히 붙들어 놓는다. 이와 비슷한 풍경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살아갔을법한 사람들이 등장했던 많은 이야기들. 오래 전 그들로부터도 어쩌면 크게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