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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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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157 요즘 날씨는 뭐랄까. 사람들이 줄을 잔뜩 서있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점심시간 팻말을 걸고 눈도 안 마주치고 동료와 수다떨며 쌀쌀맞게 돌아서는 가게 직원을 보는 느낌. 사실 이런 날씨는 상식적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 딴지 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혹여나 그래도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즌 4 기다리고 있는 중의 '킬링이브'에 따지고보면 굉장히 평범한 대사였는데 스토리 진행상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에 아주 기억에 남은 대사가 있다. '내가 널 좋아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야'. 뻘쭘한 산드라 오의 표정. 듣는 사람 입장에선 특히 그 사람의 자존감이 최정점에 도달한 상태라면 완전 주눅드는 대사이다. 추운거 좋고 흐린 날씨 너무 좋아하지만 요즘 날씨는 뭐랄까 일부러 뻐팅기는 자뻑..
식물 6월이 다 되어가지만 참으로 진도가 안 나가는 날씨. 그렇지만 아무리 낮동안 비가 오고 흐려도 오후 7시 정도에는 맑게 갠 하늘이 아주 아주 이른 아침 내가 자고 있을 때나 볕이 드는 북쪽 방향의 부엌에까지 따스한 빛을 나눠준다. 고작 5센티 정도 크기였던 다육식물은 절대 내 손에선 죽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식충 식물 같은 포스로 2년 동안 무섭게 자랐다. 다 먹은 커피용기에 옮겨주고 커피 나무라고 부른다. 이를 악물고 더 자랄 생각이라면 3킬로짜리 업소용 할라피뇨나 파인애플 캔에 옮겨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리투아니아어 85_백과사전 Enciklopedija '나의 첫 백과사전'이라는 책. 어린이 도서관에 있는 이런 책을 가끔 빌려온다. 한 번도 접할 기회도 말할 기회도 없어서 어떤 때는 알면서도 말할 수 없어 돌려돌려 설명해야 하는 단어들이 예상보다 참 많은데 예를 들면 양서류, 자전축, 홍채 뭐 그런 것들. 이런 책에는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기본적인 단어들이 삽화와 함께 총망라되어 있으니 지루하지 않게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어 좋다. 약국이나 서점의 세일 상품 전단지와 더불어 비일상적인 단어들의 보고라고 할 수 있겠다. 백과사전을 뜻하는 단어를 리투아니아어로는 '엔찌클로페디야'라고 읽는다. 그리고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나문희와 이제훈이 나왔던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문희가 동사무소 직원인 이제훈에게 영어 과외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 엠 히어 (2019) 영화를 보기 전 느낌을 생각하면 포스터가 좀 달랐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영화를 보고 포스터를 보니 딱 이 정도의 영화였단 생각도 든다. 사실 배두나 배우를 보기 위해 본 영화인데 이 영화에 관한 최대 스포일러라면 배두나는 10분도 채 나오지 않는다는 것... 15분 나왔을 수도 있다.. 마치 '1987'을 생각하며 유해진과 김태리의 케미를 보려고 승리호를 봤는데 유해진의 목소리밖에 안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끝날 때까지 업동이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었으니 그 영화는 그나마 양호한 건가. 하지만 경치 좋은 프랑스 어딘가에서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스테판이 하루 종일 수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보낼 생각으로 사진을 찍고 '벚꽃 같이 보면 좋을 텐데'라는 ..
리투아니아어 84_장작 Malkos 불을 피우다 말고 어디로들 갔을까.
Vilnius 156_마당 속 언덕 자주 지나는 거리의 어떤 건물 안마당으로 발을 옮긴다. 햇살이 넉넉히 고이는 좁은 공간에 오랜 공사 중 쌓여 방치된듯 보이는 흙더미를 무성한 잡초들이 기어이 뚫고 올라오는데 그 전체가 흡사 설치미술같다. 흙더미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건물 내부는 예상대로 지지부진한 건축 현장에 기가질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눈조차 질끈 감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곧 꽃마저 피울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든 초록 덕택에 나뒹구는 술병과 비니루조차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오며 가며 스치는 낯선 사람을 향한 시선이 아주 빨리 신발까지 미치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위아래로 훑어본다고 표현하기엔 그 짧은 순간 사로잡힌 감정은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가진 복합적이고 진지한 형태이다. 거리를 지나다 고개를 틀어 마주친 남의 집 마당에..
Vilnius 155_4월의 아틀라스 6개월 간 배달만 허용되던 식당과 카페들이 야외 테이블에 한하여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된 어제. 그리고 오늘은 눈돌멩이 같은 우박이 세차게 내렸다. 공들여 꺼내놓은 테이블엔 눈이 내려 앉았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두손을 모아 해맑게 눈을 받아낸다. 여전히 라디에이터는 따뜻하다. 젖은 신발은 고스란히 그 위로 올라간다.
주전자가 된 모카 오래 전에 드립서버 하나를 깨뜨리고 다른 회사 제품을 사니 기존에 쓰던 도자기 드리퍼가 잘 맞지 않아서 작년에 하나를 더 사게 됐다. 결국 잘 안쓰게 된 1호 드리퍼를 친구집에 가져가기로 한다. 적당한 주전자가 없어서 냄비에 끓인 물을 모카포트에 옮겨 담아 부었다. 돌연 주전자가 된 모카포트 손잡이로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손 큰 바리스타가 작은 커피 잔에 기울이고 있는 앙증맞은 스팀피쳐를 볼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무엇을 통하든 커피물은 언제나처럼 여과지 끝까지 쭉 스며들어 올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