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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37_무게 Svoris 가게에서 저울을 쓰는 사람들은 일년마다 담당업체에 가서 이 저울이 정확함을 검증하는 문서를 갱신해야 한다. 그 증명서만 따로 확인하려 오는 경우는 없지만 무슨 문제가 생겨서 기관에서 조사를 나오면 깐깐한 담당직원인 경우 그런 문서까지 다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한번 정도 저런 증명서를 갖춰놓으면 때맞춰서 갱신하라고 연락이 오니 결국 매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연중행사들을 몇 가지 처리하고 나면 어느새 일 년이 가버리곤 했다. 9월이면 한국에서도 공인인증서를 갱신하라는 연락이 온다. 완료 40일 전에 오고 36일 전에 오고 16일 전에 온다. 그걸 놓쳐서 내가 갱신하지 못하는 것이 불상사라고 나 대신 염려해주지 않으면 좋을 텐데. 차라리 이렇게 질척거리지 않고 딱 한 번, 하루 전에만 오면..
Fireworks Wednesday (2006)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 번째 작품. 이 감독의 영화는 보는 동안 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대로 끝나면 주인공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계속 남은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작에서 돈문제까지 얽혀서 대안 없는 사람들이 겪는 불행을 주로 얘기했다면 이 영화를 기점으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중산층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래서인지 보는 동안의 막막함은 좀 덜하다. 물론 그 계층간의 거리감이 직접적이진 않지만 은근히 드러나기도 한다. 가정문제,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이 개인이 겪는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아주 단순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당사자 외의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면서 영화가 진행되니 등장하는 사람들..
리투아니아어 136_올리브 Alyvuogės 이탈리아 도시 루카에 관한 짧은 기사를 읽다가 떠오른 장면 하나. 루카는 아마 피렌체에서 당일치기로 피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었다. 이 가게에서 점심용으로 술 한 병과 포카치아, 치즈 등 주전부리를 샀지만 정작 올리브는 사지 않았다. 아마 이 장면만으로도 충분했다 생각했나 보다. '올리브가 세 알 밖에 없으면 예쁜 접시에 담아먹으면 된다' 좋아하는 터키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극 중 부유한 극작가가 가난한 세입자의 지저분한 집을 보고 내뱉은 말이라 앞뒤 정황을 생각해 보면 좀 도도하고 재수 없게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이 대사가 참 좋았다. 올리브를 먹을 때마다 떠올리고 간혹 인용하게 된다. 작가가 생각해 낸 말일 수도 있지만 왠지 중동지역의 격언이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터키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
Beautiful city (2004)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의 느낌상 왠지 이 제목이 미심쩍고 간혹 원제가 정말 뚱딴지같은 경우도 자주 있으니 찾아봤더니 실제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을 가진 테헤란 근교의 '샤흐레 지바'라는 동네라고 한다.샤흐레 지바의 소년원에 수감 중인 아크바르는 16살에 여자친구를 살해한 죄로 소년원에 들어왔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여자친구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란에서 사형집행이 가능한 나이는 18살. 교도소 친구 알라(Babak Ansari)는 그것도 모르고 아크바르의 18살 생일 이벤트를 열고 아크바르는 성인 교도소로 옮겨진다. 아크바르는 영화 초반 소년원씬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문제들은 교도소 밖의 사람들에..
Dancing in the Dust (2003)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데뷔작을 보았다. 이분은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 각본을 쓰다가 감독 데뷔를 한 경우인데 이 데뷔작과 다음 해에 만든 두 영화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확실히 좀 더 날것의 저예산 느낌이다. 악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박하사탕, 똥파리 같은 한국 감독들의 데뷔작을 봤을 때 느낌이랑 비슷했다. 그의 최근 영화들이 더 재밌고 절묘하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런 영화는 감독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이런 초기작의 느낌을 다시 구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64색 물감을 쓰던 사람에게 갑자기 8색 크레파스를 쓰라고 하면 좀 당황스러워할 것 같고 봉준호 감독에게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애원하면 난처해할 것 같다. 나자르(Yousef Khadopa..
리투아니아어 135_우정 Draugystė 휴양지에서 만난 티셔츠 한 장. 저 흑백 프린트된 남성을 보자마자 혼신의 힘을 다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발뺌하다 결국 이실직고하는 어느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리투아니아 사람이라면 알 만한 꽤 유명한 장면인데. 그런 것들의 생리가 늘 그렇듯 일부 아는 사람들이 남들도 모두 다 알 거라고 생각하며 끈질기게 끼리끼리 회자하는 힘으로 인해 또다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1979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음주 운전자를 인터뷰한 장면인데 나에겐 일종의 음주와 우정의 질긴 밈처럼 각인됐다. 누구와 마셨냐고 물으니 친구라곤 없다며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사람의 웃픈 모습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회자된다. 한국어의 특성상 단어들을 연결 지을만한 일말의 의미라도 있을..
리투아니아어 134_고등어 Skumbrė 오른편으로는 라트비아, 멀리 바다 건너 스웨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뜬금없이 모터를 단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배를 댈 만한 아무런 명분도 준비하지 못한, 공들여 쌓아 놓은 던전과 감시탑이 있을 뿐인 모래사장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너무 요란해서 도리어 위협적이지 않은 모터소리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내려서 갑자기 총질을 할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다. 지방 유지의 아이들이 치기 어린 뱃놀이를 한다고 하기에는 허름한 배 한 척, 크레용으로 그려놓은 듯한 리투아니아 국기가 녹슨 뱃머리에서 펄럭이고 배안에는 한사코 안 가져가겠다는 아들들을 나무라며 엄마들이 던져놓은 듯한 구명조끼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팔고자 하는 이들은 그 흔한 호객의 단어 하나조차 내뱉지 않았지만 헐벗은 몇몇 사람들이 장지갑..
리투아니아어 133_파인애플 Ananasas 얼마 전에 빌니우스의 외국인 커뮤니티에 재밌는 글이 올라왔다. 유럽의 그토록 많은 언어에서 파인애플을 Ananas라고 하는데 이미 -as로 끝나는 이 친절한 외래어에 리투아니아어는 굳이 왜 또 남성어미인 -as를 붙이냐는 뉘앙스의 글이었다. 그의 고충을 이해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 가령 제임사스 스카르스가르다스 - 구텐베르가스처럼 불리는 것에 큰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나나스'라고 해도 다 알아들을 파인애플이 '아나나사스'가 되는것은 격변화를 위해선 사실 불가피한 일이다. 파인애플 쥬스 Ananasų sultys 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 남성 어미 -as를 붙이지 않고 외래어인 ananas에서 변형을 하면 s가 무참히 떨어져나가면서 Ananų sultys가 된다. 아나나수 대신 아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