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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커피 네가지 종류의 치즈가 600그램이나 들어간다는 요리책 속의 치즈 파이를 옆에 두고 입맛을 다시며 커피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커피가 그림의 떡인 순간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좋았다. 자이살메르의 사막에서도 칸첸중가 트렉킹에서도 인스턴트 커피 한 봉지 정도는 왠지 호주머니에 있을것만 같다.
어제와 오늘의 커피 모카로 커피를 만들고나면 다 추출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피식하면서 흘러나오는 한 두방울의 커피가 있다. 잔에 부으려고 기울이면 워낙에 작은 양이니 포트 입구까지 오는 동안 포트 내부에 긴 흔적만 남기고 결국 흘러나오지 못하는 한 방울의 커피. 커피바스켓 말고는 포트 자체를 잘 씻지 않게 되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남겨진 커피를 결국 다음 커피와 함께 마신다는 이상한 생각때문인 것 같다.
Vilnius 142_아틀라스 작년에 새로 페인트칠한 구시가의 공대 건물. 엄청 꼬질꼬질했는데 갑자기 너무 하얘져서 심지어 날씨가 너무 추우니깐 아틀라스가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 같다.
박스 위의 커피 가끔 커피 마시는 곳.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곳이지만 매 순간 미세하게 정리가 되고 있는 중이니 아쉬움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이곳에는 지난번에 마시고 씻지 않은 커피 찌꺼기가 묻은 티스푼이나 액상 프림, 걸레 빤 물이 가득한 빠께쓰와 오래된 먼지와 남이 버린 책 같은 것들이 혼재한다. 그리고 20미터 거리에 빵집이 있다. 친구와 빵집에서 캐온 버섯과자에 커피를 마시며 전재산을 털어서 산 조그만 미니밴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한다면 그곳에 뭘 집어넣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컵은 꼭 필요할 거다. 양치질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커피에 연유 이 유리잔은 컵홀더가 따로 있는 소련시절 잔인데 차보다는 베트남식 커피를 내릴때 더 자주 쓰게 된다. 차가운 연유 위로 똑똑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감상하기에 딱이기 때문이다. 숟가락으로 휘젓지 않는 이상 커피와 연유는 섞이지 않는다. 연유의 두께가 좀 도톰해야 커피의 모습이 예쁘다보니 이 커피는 항상 달아진다.
The mule (2018) 미나리를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라서 웃겼다. 농장일을 시작하는 제이콥(스티븐 연)에게서 원예 일에 미쳐 한평생을 보낸 할아버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겹쳐졌다. 정작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도 제이콥의 노년도 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그 둘의 삶은 전혀 달랐기를 바라지만. 아흔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손녀딸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달콤한 할아버지이지만 딸과 아내와는 사이가 안 좋다. 원예 관련 시상식에 상을 타러 가느라 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고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일을 택하고 가족을 등한시한 결과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나마 살가운 손녀딸과 한 줌의 잡초 덩어리. 그렇게 무료하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던 그는 트럭으로 물건을 옮겨보지 않겠냐는 제안..
미나리 (2020) 콩나물이 나왔으니 미나리. 콩나물 다듬는 주인집 아줌마 (ashland.tistory.com/1015),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콩나물 사러 가는 아이(https://ashland.tistory.com/1016), 그리고 딸 보러 미국에 와서 미나리 키우는 할머니. 콩나물 무침에 미나리며 쑥갓이 들어간 전골이 보글보글 끓는 밥상에 이들이 빙 둘러앉아 수다 떨며 저녁 먹는 모습을 상상해도 별로 낯설지 않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가 곧 드라마일진대 크게 억지 쓰지 않고 양념 치지 않고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예산 영화 특유의 방식들로 서로 모두 닮은 구석이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잘 죽기. 그러기 위해서 인생은 많은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지만 왠지 그러기엔 아..
콩나물 (2013) 이 영화는 꽤 오래 전 영화이고 짧은 단편 영화이며 아마 가장 짧고 경쾌하지만 먹먹한 로드무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울 풍경을 지닌 영화들을 떠올리다 생각나서 짧게 나마 기록해둔다. 그런데 이 싱그러운 여름 날의 영화는 할아버지 제삿상에 빠진 콩나물을 사러 간 아이가 과연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둘 수 없게 하며 의외의 긴장감과 초조함을 선사한다. 어떤 관객은 콩나물을 향한 어린 소녀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즐겼을지도 모른다. 목적이 확실한 여행이 있고 불분명한 여행이 있다. 이 여행도 저 여행도 쉽지 않다. 전자는 좀 더 빨리 효과적으로 잘 가야한다는 생각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고 후자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모호함에 힘들다. 하지만 어떤 여행에든 위험이 따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