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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129_언제나처럼 10월 이 동네의 발코니는 보통 끽연을 위해 잠시 얼굴을 내밀거나 날이 좋으면 앉아서 볕을 쏘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수년간 이 건물을 지나다니며 하는 생각이란 것이 술을 잔뜩 마신 사람들이 발코니가 없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저 문을 무심코 열고 해장용으로 끓인 뜨거운 홍차와 함께 떨어지면 어쩌지 뭐 그런 종류이다. 평균 연식이 50년은 족히 되는 구시가의 집들 중에는 사실 저렇게 발코니를 뜯어낸 집이 많다. 보통 그런 경우 문을 열지 못하게 안쪽에서 못을 박아놓거나 문 앞에 작은 화분들을 여러 개 세워 놓거나 하는 식이지만 언젠가 한 여름 저 노란 문 한쪽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 왠지 누가 문을 열고 떨어질 것 같은 상상에 혼자 덜컹한다. 언제나처럼 10월이 되었다. 예상..
오늘은 쉬는 날 오래 전 인도의 뉴델리 코넛 플레이스를 걸을때이다. 맥도날드 앞에 경비원이 보초를 서던 꽤나 번화가였는데 저울을 앞에두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깡마른 할아버지가 있었다. 집에 체중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길거리에서 체중을 잰단다. 얼마전에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라는 이란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 속에도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다. 뉴델리에는 없었던 활활타는 장작이 그 옆에 함께였다. 지나가는 여주인공을 붙잡고 체중을 재보라고 하는데 55킬로가 나간다는 여자에게 78킬로그람이라고 우긴다. 체중계를 고치셔야겠다는 여자의 말에 할아버지가 그런다. '저울일은 이틀에 한 번 만이야. 내일은 구두를 닦을거야.' 가위와 칼을 갈던 이는 그날 무슨 다른 일을 하러 갔을까. 이곁을 지나면 만두 찜통에서 뿜어져나..
서울의 피아노 학원 나는 서울에서는 가희 피아노 학원을 10개월, 천안에서는 리듬 피아노 학원을 2년을 다녔다. 쇼팽 피아노 학원이나 모차르트 피아노 학원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많은 것들이 자취를 감춘 와중에 유난히 남아있는 피아노 학원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어릴때 놀았던 마당 초등학교 입학하고 4년 동안 살았던 이 집 마당을 서울에 갈 때마다 찾아가서 들여다보곤 했다. 3층에 살던 주인집 할머니는 꽃을 정말 좋아했다. 마당은 거의 항상 젖은채였다. 마당엔 장미 나무가 있어서 가시를 떼어 내어 코에 붙이고 코뿔소 놀이를 했고 물방울이 떨어져도 묻어나지 않고 서로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어 떨어지던 잎이 넓적했던 화초를 비롯해서 마당에는 화분이 가득했다. 화초를 돌보는 할머니와는 이야기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의 며느리는 어머니가 또 화분에 물을 주시는 모양이구나 하는 시크한 표정으로 항상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복도에는 어김없이 귀뚜라미들이 뛰어다녔다. 뒤쪽으로 향하는 저 큼지막한 계단에 서있던 동생의 사진을 쥐고 창원 친척집에 놀러 가서 눈물..
Vilnius 128_동네 한 바퀴 헤집고 또 헤집고 들어가도 끝이 없는 곳. 전부 다 똑같아 보이는 와중에 항상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는 곳. 그곳에 꼭 뭔가가 있지 않아도 되는 곳. 깊숙이 들어가서 몸을 비틀어 되돌아봤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곳. 너와 함께 헤매는 모든 곳.
사냥의 시간 (2020) 기생충뽕에 온 한국이 휘청거릴무렵 보란듯이 국제영화제빨을 세우며 나타난 영화. 비록 굳이 그때 바이러스가 세상을 휘저어놓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조명을 못받아 안타깝군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 오히려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망작이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또 되려 미안하고 안타깝고 복잡한 마음이 드는 아쉬운 영화이다. 마치 혜성처럼 나타나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가 다음 올림픽 예선 1차전에서 탈락할때의 느낌처럼 허무했다. 그 금메달은 역시 우연이었어 라고 말하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감독의 전작인 파수꾼 (https://ashland11.com/69) 은 정말 멋진 영화였는데.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 영화 속에서 교복을 입고 있..
갑자기 커피 걷다가 비가 오기 시작해서 계획에 없던 마트에 들어갔고 장을 다 봐도 비가 그치지 않아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예보에 비가 온다던 날 비가 안 오길래. 비가 안 온다는 날도 비가 안 올 줄 알았지. 빨래는 또 젖고. 한 모금 들이키고 나니 비가 또 그쳤다.
Vilnius 127_없어진 가게들 저 쿠폴이 얹어진 건물에는 내가 좋아했던 빵집과 베트남 식당이 있었는데 코로나 봉쇄가 풀리고도 결국 문을 열지 않았다. 먼 발치에서 저 양파돔을 보며 이제는 없는 나폴레옹 케익과 쌀국수 국물을 잠시 떠올렸다. 이곳은 버스터미널 근처의 언덕인데 얼마전에 놀이터가 생겨서 역에 마중나갈일 있으면 잠시 들른다. 그래서 올때마다 항상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