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베트남 식당이 안타깝게도 문을 닫아 일 년간 비어있던 자리에 할랄표시가 붙은 꽤 진지해 보이는 무슬림 식당이 생겼다. 새로 생긴 식당의 운명이란 것이 음식이 맛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손님이 많아지면 처음과 달리 뭐가 변해도 변하게 되니 최대한 빨리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순간 한번 정도는 꼭 가보게 된다. 이 식당 건너편에는 십 년도 끄떡없는 아르메니아 식당이 있고 이 골목의 끝에는 작년 여름에 생겨 성업 중인 케밥집이 있는데 이들은 보기 좋게 삼각편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식당들 특유의 동향들의 커뮤니티 같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 낯섦은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을 하다가 알게 된 현지인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얼떨떨하면서도 푸근하다. 카이로의 시리아 대사관 앞에서 알게 된 소녀 파트마의 집에서 얻어먹은 푹 고운 닭고기 요리, 서울에서 알바를 하다 알게 된 조선족 동생의 대림동 집에서 먹은 그녀의 아버지표 훠궈와 땅콩요리. 옛 동료들이 식당으로 만들어오던 샛노란 파키스탄식 치킨 비리야니와 완두콩가루 부침개까지. 전부 다른 사람들의 다른 맛의 요리지만 한국음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부위의 고기가 만들어내는 생경한 식감과 향신료의 맛이 묘한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모든 순간은 과거의 어떤 즐거웠고 고유했던 지점으로 연결되어 현재에서도 과거에서도 확장된다. 지금 이 순간도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떠오를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매 순간이 폐기될 수도 수정될 필요도 없는 또 다른 순간에 대한 대꾸일 뿐이다. 어떤 맛이나 향기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식당 출입문에 새벽 3시부터라는 라마단 기간의 영업시간 공지가 붙어있다. 주문을 받은 후 서비스로 나오는 차주전자나 찻잔들의 수더분한 모양새와 카운터 근처에 어깨동무를 한 듯 일렬로 꽂혀있는 중앙아시아의 국기들, 지난번 베트남 식당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한 테이블과 의자들, 가장 무난한 화질로 프린트했겠지만 분명 더 좋은 화질일 수 있었던 메뉴 속 요리 사진에서 이들이 커다란 초기 자본을 들이지 않고 곧바로 주도면밀하게 이 식당을 시작했음이 한눈에 보였다. 우크라이나 혹은 벨라루스에서 식당을 하던 이들이 모든 그릇을 들고 이곳으로 이동해왔음이 분명하다. 폴란드만큼은 아니지만 리투아니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유입된 인구가 상당하다. 거리 거리의 언어와 인상들이 전에 없이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오히려 우크라이나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고 살았을 우크라이나인들보다 언젠가 또 다른 곳에서 우크라이나로 와서 살다가 또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시 이곳으로 떠나온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이들은 반세기도 더 전에 강제이주를 당해 정착한 사람들의 자손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에게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료프에 나오는 타타르인의 눈빛도 보였고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예선에서 우리나라 선수들과 자주 만나던 단단한 체격의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기개도 보였다. 홀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주방에서 들락날락하는 남자 요리사들과 이런저런 야채와 과일들을 나르던 남자들 사이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주문을 받던 여인은 아빠의 고향 여동창 같았다. 어쩌면 이들의 뿌리는 나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벼르다가 간 식당이라 이것저것을 시켰다. 만타이라는 만두와 라그만이라는 면요리와 매운 소고기 요리 한 접시 그리고 국물에 찍어 먹기 위해 메뉴의 맨 마지막에 적힌 빵 한 조각을 추가로 주문했다. 신기하게도 65센트짜리의 이 빵을 주방이 아닌 카운터 아래의 어딘가에서 꺼내주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센베이 과자처럼 커다란 상자 속 봉지에 잔뜩 담겨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다 먹고 계산을 하고 나가는 사람도 이 빵 서너 개를 봉지에 담아 갔다. 이 빵은 베이글과 피타빵 사이의 어디쯤이다. 만두는 그루지야 만두 힌칼리와 우리나라 찐 고기만두 중간쯤이다. 라그만은 하얼빈 학생 식당에서 특별식처럼 먹었던 국물 없는 신장 볶음면과 국물 있는 도삭면의 중간쯤이다. 모든 것이 중간쯤이다. 담에 가면 카잔 케밥과 볶음 라그만을 먹어봐야겠다. 어쩌면 쁠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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